제때 못쓰는 유가완충기금/박신옥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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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돈 빌려쓴 사람은 많은데 정작 돌려줄 당사자는 없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OPEC(석유수출기구)의 기준가 인상으로 유가상승이 발등의 불이 되자 요즘 정부부처간에 벌이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동자부는 내년 유가전망이 불안한 데 따라 기획원과 재무부에 그동안 재정융자에 빌려준 유가완충자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벌써 지난 5월인데 현재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재정융자에 쓴 1조2천억원이 모두 농어민ㆍ중소기업ㆍ수출지원 등의 장기정책자금으로 투ㆍ융자되어 현실적으로 회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급한 때 쓰자고 만들어 놓은 기금의 관리를 잘못한 동자부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동자부는 장래 유가불안에 대비한다며 지난 10여년간 석유사업기금을 거둬왔다. 그게 작년말 현재 5조2천여억원이나 된다.
특히 85년 이후에는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실제 원유도입가는 8달러(배럴당)선인데 15달러를 기금으로 얹어 거뒀기 때문에 기금규모도 꽤 커졌다. 국민들은 그만큼 비싼기름을 쓴 셈이다.
이렇게 해서 돈이 눈덩이처럼 쌓이자 정부내에서 돈 좀 같이 쓰자고 여기저기 손내미는 곳이 늘었고 심지어 국회에서조차 당초 기금목적과는 상관도 없는 추곡수매자금 지원에 끌어넣기도 했다.
국제원유가야 언제 다시 오를지 알 수 없으니 있는 돈을 쳐다만 볼 수 없고 여기저기서 뜯어쓸 때는 좋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서 난 돈인가. 기금을 이곳저곳으로 끌어쓴 정부부처도 그렇지만 주무부처로서 줏대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닌 동자부는 무엇을 했는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보다도 돈을 되찾기가 힘들고 국제유가는 오르니 할 수 없이 국내유가를 인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정부내의 움직임이다.
석유사업기금을 거두기 시작할 때만 해도 정부는 『쌓인 기금중 1조6천억원만큼은 전혀 손을 안대고 이를 인상요인이 있을 때 쓴다. 도입 원유가가 배럴당 22달러까지 올라도 국내유가는 2년간 전혀 올리지 않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이제는 공수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정부의 하는 일이 이래서야 「정책의 신뢰성」이 생기고 국민들이 정부를 믿을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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