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영화판에서도 단연 '타짜' 허영만표 만화의 매력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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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영화('비트'등)와 드라마('미스터Q'등), 애니메이션('날아라 슈퍼보드'등)으로 확인된 그의 역량이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다. 냉혹한 도박판을 흥미진진하게 그린 '타짜'는 극장가에서 관객 500만명을 돌파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맛의 근원을 추구하는 '식객'역시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한창 진행 중이다.

서울 수서에 있는 허 화백의 예쁜 이층집을 찾았다. 하늘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한창 만화를 그리고 있던 그는 씩 웃으며 곧 자주색 남방에 청바지, 원색의 비니(딱맞는 털모자) 차림의 산사나이로 변신했다.

"좋지요. 허허."

그는 영화의 선전 소식에 고무된 표정이었다. 영화의 원작이 된 만화의 1부 '지리산 작두'도 4권의 양장본(랜덤하우스코리아)으로 막 출간된 상태다. 1000만 돌파에 대한 예상을 묻자 "18세 관람가의 기록은 '친구(818만 명)'가 최고라면서요"라고 되묻는다.

-영화로 보니 느낌이 또 어떠신가요.

"원작자라고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진 않아요. 저 사람 까다롭다고 소문나면 인생 고달프니까(웃음). 또 영화는 그쪽이 전문가잖아요. '범죄의 재구성'감독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정도면 됐다고 했어요. 감독도 자기 색깔이 있을 테니. 열에 아홉은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타짜'는 어떻게 기획하신 건가요.

"한 출판사 사장이 1960년대 은퇴한 노름꾼 얘기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랬어요. 처음엔 '그게 뭐 재밌나'싶었죠. 지리산까지 찾아갔는데 얘기도 잘 안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슬쩍 '기술'을 보여주는데 손도 안 댄 화툿장이 감쪽같이 사라지더라고. 게다가 돈 잃은 사람들에게 딱 본전씩만 찾아주고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그 뒤로 서너 명을 더 만났어요. 그런데 문제는 다들 얘기를 중간까지밖에 안 한다는 거야. 그때부터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우리 몫이었죠."

이 대목에서 그는 스토리작가 김세영(53)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허 화백과의 첫 작품 '카멜레온의 시(1986)'로 일약 스타작가가 된 그는 '타짜'를 비롯해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 '사랑해' 등에서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이야기 구성과 대사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A4 용지만 한 노트에 김 작가가 칸을 나누고 대사와 지문을 그려오면 허 화백이 이를 그림으로 완성하는 식으로 일한다. "김세영이는 꼭 할 말만 한다. 게다가 일만 벌이고 흐지부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끝까지 밀고 가는 뒷심이 대단하다"는 게 허 화백의 평가다.

-실제로도 화투를 잘 치시나요?

"옛날엔 가끔 재미 삼아 쳤는데 그렇게 잃지는 않아요. 일단 뭘 시작하면 치열하게 하는 편이죠. 산에 가면 정상에 올라야 하고, 낚시를 하면 월척을 낚아야 하고(그는 바다낚시 경력이 30년이다. 얼마 전부터 등산에 맛을 들여 박영석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 K2 등정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 치열한 승부 감각이 작품의 맛 같습니다.

"대결을 그리는 게 재미는 있지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과장이나 작위적인 게 싫어지더라고요. 대신 소시민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리고 싶죠. '식객'도 그런 이유에서 시작한 것이고."

-이른바 '허영만표 만화'가 잘나가는 이유는 뭔가요.

"허허, 또 그 얘기네. 글쎄요, 내 만화에는 수퍼맨이 없어. 그냥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지."

-그런 건 평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심한 표현이 중요하죠. 예를 들어 식사 장면을 그릴 때 이 사람이 숟가락을 들까, 젓가락을 들까를 갖고 하루 종일 고민한 적이 있어요. 뭘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결정되고 거기에 따라 전체 내용이 바뀌는 거거든."

그의 꼼꼼함은 정평이 나 있다. 항상 카메라와 노트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한다. 최근 다녀온 캐나다 취재에서는 30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주요 건물과 자동차, 거리의 모습은 다양하게 변주돼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특히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의 얼굴. 이를 위해 그가 보물처럼 생각하는 것이 지하 자료방에 있는 '마스크'파일이다. 신문과 잡지에서 찾은, '사연 있어 보이는'얼굴이 빼곡하게 차 있다.

-특히 등장인물의 입술을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코와 눈은 과장하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입술에 액센트를 주면 다른 얼굴로 만들기 쉽거든요."

-만화 주인공들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는 이유는.

"그리다보면 내 그림이 내가 싫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독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바꿔야 합니다. 그래도 크게 바뀌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얼굴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저절로 관상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서양과 동양은 어떤지, 성형이나 정형하면 인생이 달라지는지, 천하게 태어난 자는 귀하게 살 수 없는지 등등. 이런 얘기를 하니까 마누라는 '갈 데까지 갔다'고 해요(웃음)."

일어서면서 '타짜'만화책에 사인을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적었다. "고스톱 칠 때 1장 더 챙기시면 100전 100승입니다." 한 장을 더 챙겨라-. 물론 이것은 규칙 위반이다. 하지만 규칙을 위반하라는 말보다 항상 비장의 카드를 하나 더 챙겨놓고 있으라는 뜻으로 들렸다. 모름지기 인생이란 하루하루가 '타짜'들과의 진검승부 아닌가.

글=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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