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특별취재팀 50일간 현장에 가다(28)|인구 모자라는데 줄 잇는 해외이주|탈출 성 이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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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르헨티나 신문 보도들에 따르면 최근 15년 동안 해외로 이민을 떠난 아르헨티나 국민의 숫자가 2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89년 말 현재총인구는 3천3백만 명.
그러니까 인구의 16분의 l이 해외로 이주해 버린 셈이다. 우선 수적으로도 많지만 인구밀도가 조밀해 해외이민을 장려하고 있는 나라라면 이 정도의 해외이민을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정반대로 해외이민을 장려할 입장이 아니라 국가개발을 위한 「이민」을 적극 유치해야 할 절박한 현실이라는데 문제의 비극적인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한 정부당국자는「현재의 아르헨티나 국토를 개발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1억2천만 명 정도가 적정인구』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해 들어선 메넴 정권은 외무부에 이민담당 특별대사까지 두고 세계 각 국으로부터의 이민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미 각 국이 공통>
취재팀은 아르헨티나정부 관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민을 둘러싼 이 나라의 너무나도 상반된 양면성의 현실을 서글프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가 기우는 징조처럼 느껴지기 조차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이민 엑서더스.
이런 탈출 성 이민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 공통된 현상이다. 브라질도 정확한 통계나 추산이 아직 잡혀 있진 않지만 근래 많은 사람들이 미국·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떠난 것만은 틀림없다고들 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아르헨티나처럼 해외이민 문제가 「국가적 위기」로까지 받아들여질 이유가 없다. 물론 파라과이·우루과이 같은 나라들이 아르헨티나와 비슷한 사정이긴 하지만 국토가 아르헨티나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지경은 아니다.
이 같은 아르헨티나 이민 엑서더스 현상의 직접적인 중요원인은 파탄에 가까운 심각한 경제불황과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폭 거에 따른 공포, 정부몰락의 위기의식 등 이 열거되고 있다.
특히 76년부터 수많은 군사조직과 군·경찰조직들에 마음대로 고문·살해·협박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 폭력을 제도화시키고 전국 규모화 된 군사정권의 포악한 탄압정치가 이민 엑서더스를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85년부터 민간정부가 들어서 과거 군정의 악몽을 벗어나긴 했지만 경제파국의 파고가 날로 높아짐으로써 해외이민 행렬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이민 엑서더스가 야기되고 있는 뿌리깊은 근본 원인은 국가·민족정체성과 문화정체성, 교육부재 등의 「3불」에 있다.

<「3불」이 근본원인>
비근한 실례로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 등에 이민을 간 우리교포들도 다시 미국·캐나다 등지로 제2의 이민행렬을 이루고 있는데 그 이유가 대부분 「자녀 교육문제」다. 남달리 자녀교육열이 높은 우리 교포들은 현지의 교육실태가 너무나도 엉망이고 교육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사립학교는 낙타 바늘구멍 같은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자녀교육을 위한 제2의 이민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이민 엑서더스는 그나마도 백인이나 혼혈의 경우라야 가느다란 새끼줄이라도 잡을 수 있다. 따라서 인디오·혹인 등의 원주민들은 이 대열에도 끼기 어렵다.
라틴아메리카 인들의 해외이민 엑서더스는 기득권 층이 더 높은 임금과 더 훌륭한 사회복지 혜택을 얻기 위해 대중을 암흑 속에 내버려두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전통」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증명해 주는 역설적인 희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주민은 엄두 못 내>
그러나 아직도 파나마의 산간지방 농민들은 1백 달러(7만원)도 안 되는 벌이를 위해 해마다 4개월 동안씩 그들의「인간 보금자리」인 산 속 오두막을 떠나 인근지방의 거대한 설탕농장 등에 나가 일을 한다. 그래서 이들 농민 가족들은 늘 동네 상점 주인들에게 빚을 지는데 통상 10달러를 빌려쓰면 연말에 20달러를 갚아야 하는 고리채다.
상점주인들은 농민들에게 외상을 조금 주거나 헌옷가지·헌 구두 등을 주고 농민자녀 중 한 명을 월급도 없이 밥만 먹여 주는 사 동으로 써 주면 「구세주」의 대접을 받는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는 상층부의 특권을 보장해 주는 제도적·구조적·관습적「특혜」가 현재도 엄존 하면서 이민 엑서더스의 행렬에 끼지 않아도 아직은 괜찮은 「살맛」을 누리는 부유한 백인들이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민을 받아들여야 할 절박한 처지의 나라들에서 거꾸로 아귀다툼의 해외이민 행렬이 현지 주재 외국대사관 앞에 줄을 잇고 있는 아이러니는 나라꼴이 아닌 수치스런 비극일 수밖에 없다. <글=이은윤 특집부장·문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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