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두 드라이버 '곤 VS 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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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가 가장 지루한 순간은 절대강자의 독주가 지속될 때다. 선두를 유지하는 비결이 선수의 테크닉이 아닌 드라이빙 머신의 차이라면 경기는 더욱 따분해 진다.

대신 관중은 중위권의 숨막히는 경쟁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특히 후발주자의 역전질주가 시작되면 관중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코너 부근, 위기의 순간에 화려한 테크닉으로 선행주자를 제친 선수에게는 찬사가 쏟아진다.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이 세계 자동차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양산차를 생산하는 기업간 기술격차는 반세기 전과 비교해 보면 현격히 줄어들었다. 대신 전략 마케팅과 디자인 혁신을 위주로 하는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지도력이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세계 자동차 시장의 스포트라이트는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CEO에 집중되고 있다. 최근 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합종연횡의 바람은 곤 회장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GM과 포드, 두 거대 미국회사의 경영위기에서 촉발됐지만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논의는 문제를 해결할 구세주, 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관중들은 곤과 함께 또 한명의 드라이버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하위권에 머물던 '현다이팀'을 이끌고 최근 혜성처럼 등장해 선두권으로 바짝 접근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드라이버 정몽구는 관중이 선두권 싸움에 집중해 있는 사이 삐걱거리던 F1 머신의 나사를 조여 순식간에 중위권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닛산팀 구세주 '카를로스 곤'

1999년 닛산팀에 투입된 드라이버 곤은 먼저 운전실력보다는 레이싱팀을 재정비하는데 집중했다. 숨막히는 레이스트랙에서 잠시 이탈해 팀 전체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레이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빠르게 타이어를 갈아끼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0년에서 2003년까지 진행된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 닛산 재건계획)이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닛산은 부실이 누적돼 8년 연속적자 행진을 이어가며 2000년 사상최대인 6800억엔(약 5조4700억원)이라는 엄청난 적자 수치를 발표했다.

곤은 느려터진 몇개의 정비창고를 닫아버리고 인원을 한데 모았다. 타이어 재료를 만드는 회사 중 폭리를 취하는 업체와는 거래를 끊었다. 엔지니어 관리체계는 종적인 구조에서 횡적으로 바꿨다. 손놀림이 빠르면 신출나기도 메인 정비사로 기용했다.

현실에서 곤은 일본내 생산공장을 7개에서 4개로, 부품거래처의 수를 절반으로 축소했다. NRP 실시 이전 직원은 14만1000명이었지만 NRP로 인한 공장축소 등의 정책 실시로 직원 수는 2000년 12만500명으로 감소했다. 계열사 보유주식 등 유휴자산을 신속하게 매각하고 판매조직을 재정비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2001년 닛산은 3311억엔(약 2조6600억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흑자수치를 내놓았다. 드라마틱한 'V'자 회복. 1년 사이에 8조원이 넘는 이익변동폭을 기록한 기업은 닛산 외에 전무후무하다. 닛산은 단숨에 중위권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곤은 멈추지 않고 있다. 르노와 닛산의 본격적인 제휴를 통해 레이싱 머신의 섀시를 더 싸고 강하게 만드는데 집중할 계획이다. 생산기지 공유와 교차생산으로 동맹으로 인한 업무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릴 셈이다. 2010년까지 최대 10개의 플랫폼(차체구조)을 공유하고 주요 부품인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을 공동 개발할 방침이다. 물론 각 팀의 브랜드와 정체성은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

이중 2008년까지 닛산을 위해 마련된 '밸류업' 프로그램은 △자동차업계 최고 수준의 영업이익률과 △420만대 판매, △투하 자본수익률 평균 20% 달성 등을 목표로 한다. 곤이 지시한 닛산 스포츠카 '페어레이디 Z'의 부활과 고급브랜드 인피니티의 확산은 레이스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 신종차량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 '현다이'를 다크호스로 만든 MK

경악한 관중들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표현했다. 올 4월 미 자동차 잡지 컨슈머리포트가 쏘나타를 '가장 신뢰할 만한 차'로 선정하자 미국 언론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이렇게 썼다.

타임(TIME)은 같은 달 "CEO 정몽구가 영욕의 현대차를 글로벌 성공 메이커로 변신시켜 세계 자동차 업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을 이뤘다"고 평했다. 앞서 비즈니스위크도 정 회장을 자동차 부문 최고 CEO로 선정했다.

어떤 측면에서 정 회장은 카를로스 곤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있던 것을 다듬은 것보다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게 더 창조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1950년 이후 자동차 회사를 설립해 현재 글로벌 판매순위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린 기업은 현대·기아차그룹이 유일하다.

드라이버로 나서기 전 정 회장은 운전실력보다는 정비팀의 맏형으로 레이스에 필요한 차량을 손보는 기본기를 쌓았다. 수년간 현대차써비스의 사장으로 일하며 차량 품질이 레이스에 가장 기본적인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기름을 칠하고 나사를 조였다.

실제로 정 회장은 '품질경영'을 위한 의지와 실행력이 확고하다. 그는 되도록 빠른 시간에 저렴하게 만드는 기술에 익숙해져 있던 기업문화를 변화시켰다. 드라이버가 재촉하는 와중에도 레이스에 뒤쳐지는 것을 감수하며 바퀴나사를 한번 더 체크했다. 이후 정식 드라이버로 임명되자 모든 전략을 품질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수백바퀴를 돌아야 하는 레이스에서 고장없이 추월을 거듭해 선두권에 근접했다.

이제 드라이버 정몽구는 기존 트랙에서 속도를 높이는 것 외에 선두권에 올라설 또다른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그에게 새로운 경주가 펼쳐질 무대다. 벌써 탄탄한 기본기와 빠른 속도로 경쟁상대를 긴장시키고 있다. 또 선두를 추월할 터보엔진도 만들고 있다. 당진에 건설중인 일관제철소가 만들어지면 '현다이팀'은 레이싱 머신의 뼈대를 직접 조달하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팀이 된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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