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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악은 무섭다 … 너무 평범한 모습이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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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한길사, 418쪽, 2만2000원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현장. 아이히만은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을 때, 지은이가 뉴요커지 특파원 자격으로 현지 재판을 참관한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어서 내용도 대강 알고 있는데다 대중매체에 실린 일반인을 위한 글이었기에 만만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정확하면서도 유려한 번역 덕분에 뜻밖에 술술 진도가 나간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나치 독일과 2차 세계대전을 고난 속에서 살아냈던 전선(戰線) 시대의 사상가가 아니겠는가. 쉽게 읽히지만 내용은 간단치 않다. 부제목이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히만의 처형 장면을 자세히 전한 뒤 이렇게 나온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받는 내내 판에 박힌 상투어를 하고 충실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 현실과 말과 생각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말이 특정 언어 규칙 혹은 코드에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다. 한 마디로 아이히만은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이쯤 되면 아렌트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관점에서 아이히만을 '이해했다'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 실제로 유대계 지식인들이 아렌트를 적대시하기도 했지만, 아렌트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소통하고 좋은 삶을 나누는 근거가 되는 인간됨의 보편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아이히만을 분석적으로 이해했을지언정 공감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을 보고하는 듯한 문장 하나하나에 심리.철학.역사.정치 등이 갈마들어 있기에 곱씹어가며 읽어야 할 책이다. "히틀러에게 등돌린 이들은 아무리 뒤늦게라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했고 아주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용기는 경탄할 만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분개에 의해서나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이 앞으로 패배하고 폐허가 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이 길지 않은 글이 자아내는 윤리적.역사적.정치적.심리적 함축이 사뭇 깊다.

자꾸만 도쿄전범재판과 야스쿠니 신사, 그리고 일왕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론이 떠오르는 것은 이 책에 나와 있는 아이히만에 대한 판결문의 마지막 부분 때문이다.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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