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10월께부터 소 공군 참전(재조명 6ㆍ2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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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석환특파원 모스크바 현지취재/수풍댐등 보호위해 중국서 발진/미기 격추때마다 상금… 퇴역자엔 「침묵」강요
6ㆍ25발발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련군이 언제,얼마나,누구의 결정에 의해 한국전쟁에 참가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방ㆍ개혁정책에 의해 최근에야 비로소 소련공군의 참전사실이 일부 밝혀지고는 있으나 아직도 모스크바 당국으로부터 공식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중앙일보사는 6ㆍ25를 재조명하는 특집기획의 하나로 김석환기자(경제부)를 소련에 특파,한국전 초기의 소련군 참전경위 및 활동상황등을 추적했다.
다음은 김특파원이 6ㆍ25당시 참전했던 인물들과 한국전쟁 연구학자 및 연구소를 찾아 직접 인터뷰하고 관련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소련은 1950년 한국전 발발이전부터 중국 북동부지역에 공군방위력 거점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소련 공군내에는 혹시라도 미군이 원자폭탄을 싣고와 소련에 투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공군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1947년 초부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소련에 전투기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야크기등을 이용,훈련을 받았으며 이들중 일부가 한국전 발발과 함께 전쟁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참전조종사중 한사람인 조르지 노봅즈는 12개 항공부대가 교체돼가면서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 북동부지역의 전략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공군사단을 파견했으며 한국전쟁기간중 소련공군은 이들 지역내에 있는 안동ㆍ마고야이기지에서 발진,미군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파견된 소련공군이 독자적인 판단과 작전권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는지,아니면 중공군의 지휘계통하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소련 극동문제연구소의 한국문제연구집단 책임자인 유리오그네프박사는 소련군이 중공군의 지휘계통하에서 행동했으며 소련군의 이름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스모르치코프(당시 로보브가 이끌던 3개부대중 1개부대의 지휘관)의 회고에 의하면 한국전쟁에 참가한 소련공군은 모두 자원군들이며 이들은 처음엔 어디로 가는지,언제 다시 본국으로 돌아올지도 모른채 중국 북동부지역으로 이동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공군에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싣고와 소련에 투하할지 모른다는 가설이 있었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강력한 공군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었다.
한국전에 참가했던 소련공군의 주요임무는 미군기들이 중국지역까지 넘어오는 것을 막고 북한의 보급로인 압록강 철교를 사수하며 당시 중국 북동부지역과 북한지역의 주요 전력공급원인 수풍발전소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당시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그 15기,미그 15DC기는 모두 방어용 기종이었다고 강조하면서 그들은 한국전쟁기간중 폭격등 공습을 감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스모르치코프는 미공군이 압록강 철교에 대한 공격을 해왔을때 전투에 참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소련은 1950년 10월께부터 「간접적인」개입을 시작해 휴전협정 조인때까지 최소한 5개의 항공부대와 3백명의 조종사를 투입,이들중 21명의 공군조종사들은 미군기를 격추시킨 공로로 영웅칭호를 받았다.
51년 3월부터 소련기들이 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나섰다.
1952년 1월부터 소련은 조종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미군 Bㆍ29 세이버기 1대 격추에 1천5백루블씩을 지불했고 제트폭격기 격추때엔 2천5백루블을 지불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소련은 조종사 충원을 위해 북한과 중국조종사들을 중국의 안산지역에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1952년초 약 60명의 북한 조종사가 스모르치코프의 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결과 52년 후반부터 북한군 조종사들이 전쟁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최고지휘관이었던 벨로프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관련자료나 기록들이 계속 묻혀있다.
한국전에 참전한 소련전투조종사들이 도중 고향에 돌아갈 경우 이에 대해 침묵할 것을 강요받았다.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문서나 사진은 소련 국방부가 철저히 비밀로 분류하고 있으며 관계자들도 인터뷰를 거절해 진상을 밝히기 어려운 실정이다.
소련의 이같은 비밀유지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소련 학자들간에도 1950년 이전의 한국 내부상황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을 상대로 또다시 전쟁을 한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당시 스탈린의 생각과 비밀주의에 둘러 싸인 소련군부의 전통때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PN JAD
PD 19900622
PG 09
PQ 02
CK 07
CS A10
BL 1600
GI 김석환
TI “중국군의 지휘받았다”/유리 오그네프 소 극동문제연 한국관계책임자
TX ◎“한국문제 전쟁으론 해결안될 일”
소련의 극동문제연구소 한국관계연구책임자인 유리 오그네프박사는 6ㆍ25의 가장 큰 교훈은 한국문제가 결코 전쟁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오그네프박사와의 인터뷰 내용.
­금년으로 한국전쟁발발 40년이 된다. 최근 페레스트로이카 덕분에 한국전쟁에 관한 소련쪽의 자료와 견해들이 부분적이나마 공개되고 있는데 소련국내 한국전쟁연구의 최근 동향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학자들의 견해는 개인의 입장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련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은 북한의 입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북한의 입장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전쟁의 결과를 놓고도 우리학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소련이 전면부정했던 것과는 달리 최근 한국전쟁에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증언형식으로 폭로되고 있고 북한이 남침했다는 주장들이 소련쪽에서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박사의 의견은 어떠한가.
『소련의 공군부대가 참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군대의 이름으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련이 참전한 것이 아닌가.
『소련은 미군이 북한지역으로 넘어온 이후에 참전했다. 미군기들이 중국지역을 공격한 이후부터 소련군을 투입,대항했다. 그것도 공군부대가 중국지역의 기지에서 중국군의 지휘계통하에서 참가했다. 따라서 소련이 참가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시 소련군의 지휘관은 누구였나.
『소련군은 중국군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최고 명령권자는 당시 중공군 최고사령관인 펑더화이(팽덕회)였다. 그러나 파견된 소련공군의 책임지휘관은 코제두브였다. 그는 소련군 전쟁영웅으로 2차대전 당시 독일군 비행기를 많이 격추시킨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북한이 남침을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미하일 스미르노프의 의견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1949년에 내가 처음으로 한반도에 갔을 때에도 38선을 따라 남북한간에 충돌이 있었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한마디로 잘라 말해서는 안된다. 외세(미국과 소련)의 책임도 있고 한반도내에 존재했던 북한 및 남한세력 사이의 대립도 전쟁발발의 주요한 원인이다. 6ㆍ25발발 이전에도 38선을 따라 이미 많은 충돌이 빚어졌으며 이러한 복잡한 대립 양상 때문에 50년 6월25일 아침 상황은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미하일 스미르노프는 왜 그러한 주장을 했다고 생각하나.
『미하일 스미르노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한국전쟁 직전에 김일성이 소련을 두차례에 걸쳐 방문,스탈린과 전쟁문제를 상의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전을 김일성이 소련과 공모했다는 것은 미국의 선전일뿐이다. 소련과 북한간엔 어떠한 합의된 결정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왜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했나.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48,49년에 소련은 북한과 경제 및 문화협정을 체결했다. 김일성은 이것과 관련해 소련 정부와 의논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방문은 한국전쟁과 연관이 없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전쟁이 한국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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