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닭싸움…그보다 더 재밌는 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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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의 공격이 날카롭슴다. '도리탕' 꼬꼬댁, 앞발차기를 맞고 비틀비틀. 주인의 성질이 매우 사나운디. 오늘 경기서 지면, 바로 털 뽑히고 닭도리탕 될 텐데,정말 안타깝슴다. '도리탕',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슴다."

추석 연휴 끝인 10월 8일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 동문 앞.

두 마리의 닭이 벌이는 혈투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문화영(55)씨의 재미진 중계방송에, 웃음을 터뜨렸다.

또 다른 닭들의 경기.

"'땡벌', 다리가 부실해 고전하고 있씀다. 아마 어젯밤 암탁과 함께 잔 탓인 것같슴다. 주인 양반, 시합 있기 전 날 밤에는 합방시키믄 힘을 못 쓴다고 혔잖여."

곁에 앉아 '해설'하던 보존회장 김영태(57)씨는 "어이,'땡벌'이 들으믄 어쩔라고 그런가. 목소리 낮추랑께"하고 장단을 맞춘다.

순천민속닭놀이보존회가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2시간안팎 낙안읍성에서 닭싸움을 붙여 관광객들에게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경기는 지름 4m가량의 원형 '링'에서 벌어진다. 한 경기는 20분 동안 진행되며, 하루에 5~6경기를 한다. 한 마리가 쓰러지거나 큰 상처를 입어 중간에 KO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합은 저울로 무게를 달아 체중이 비슷한 것끼리 붙인다.

순천시가 예산을 지원하는 덕분에 승리한 닭은 9만원, 패배한 닭은 7만원씩 수당을 받는다. 물론 돈은 주인이 챙기지만.

출전 닭들은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가 원산지인 투계(鬪鷄)들. 보통 닭보다 키가 훨씬 크고, 날갯죽지 앞부분이 툭 튀어나와 기골이 장대한 모습이 독수리나 매를 연상시킨다. 몸통과 다리에 군살이 없다.

투계들은 서로 보기만 해도 목털을 세우고 상대에게 달려들 만큼 공격적이다. '피를 보는' 경기도 많고, '쌍칼'처럼 상대의 공격에 한쪽 눈을 실명한 채 출전해 외눈으로 싸우는 것들도 있다.

낙안읍성 닭싸움놀이는 3년 전인 2003년 9월 보존회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됐다. 보존회는 현재 경기를 할 수 있는 어른 닭 4마리 이상을 가진 13명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 낙안읍성 안팎에서 장사를 하거나 논.밭.과수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초창기에는 그냥 밋밋하게 경기만 치렀다. 구경꾼이 잘 모이지 않았고, 지켜보던 사람도 게임이 좀 지루해진다싶으면 자리를 떴다.

2년 전부터,이제는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특수 직업인,투계 중계 아나운서'를 자처하는 문씨가 마이크를 들었다. 사투리를 섞고 우스갯소리를 곁들여, 현장 중계를 한 것이다.

문씨는 "어렸을 때 권투 중계방송서 봤던 것 흉내내고, K-1 등 격투기 TV중계를 보면서 어떻게 하나 유심히 보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한다"고 했다.

중계 중간에 투계들의 특성과 낙안읍성 닭싸움의 유래 등을 설명하기도 한다.

재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절대 있어선 안되는 실수'도 자주 범한다. "아, 정말 죄송함다. 제가 너무 흥분한 바람에 지금까지 혼동해 두 선수를 바꿔서 중계하고 말았슴다. 빨간 띠가 아니라 파란 띠가 '강타'임다."

요즘 경기 때마다 관중이 150~300명으로 늘게 한 데는 보존회장인 김씨가 주로 맡는 링 아나운서의 '구수한' 선수 소개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식이다. "빨간 띠, 노암마을 김팔용씨 달구장태 소속, 몸땡이 무게 여덟근 백냥, 다섯 번 싸워서 네 번 이그고 한 번 비그고-, '도리탕' 꼬꼬댁-'

낙안읍성 인근에는 오공(蜈蚣)재와 빈계(牝鷄)가 재가 있는데,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기 위해 상극인 닭을 많이 길렀다고 전해진다.

순천=이해석.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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