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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장 반기문'이 유념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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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러나 기쁨은 곧 근심으로 바뀌었다. WHO 내에서 원성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독단적 업무 스타일과 함께 정실 인사를 한다는 게 주된 불만이었다. 특히 그가 요직에 일본인들을 주로 앉힌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분위기는 더 나빠졌다.

곪으면 터지는 법, 5년 임기를 마친 나카지마가 연임을 시도하자 갈등은 표면화했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줄줄이 그를 질타했고 서방 정부들은 대놓고 교체를 요구했다. 웬만하면 연임되던 이전과는 딴판이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부하 직원들의 입을 빌려 "나카지마는 유능한 간부들을 날리고 그 자리를 측근들로 채워 왔다"고 비판하고 "그의 연임은 WHO 내에 도덕적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급해진 건 일본 정부였다. 그래서 나카지마의 연임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투표권을 가진 나라들을 상대로 집요한 로비를 벌였다. 뉴욕 타임스는 "일본 정부가 회원국 외교관들에게 향응을 베풀면서 로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일본이 경제가 어려운 개발도상국에 '나카지마를 밀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다'고 위협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결국 그는 찬반 투표에서 18 대 13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는 지금도 그를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인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물론 곧 유엔 사무총장에 오를 반기문 장관을 여기에 견주는 건 기우이며 실례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 특유의 혈연주의가 그를 옥죌까 두렵다. 크게 출세하면 친가.외가.처가, 소위 삼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우리네 옛 정서였기 때문이다.

반 장관이 유력한 유엔 수장 후보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국익' 얘기가 나왔다. 한국 외교의 지평이 넓어지리란 희망과 함께 그가 남북 문제 등 각종 현안을 다루면서 우리의 국익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넘치고 있다. 이참에 유엔 발주 공사를 대거 수주하길 바라는 업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소박하게는 유엔에 보다 많은 한국인이 진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반 장관이 앞으로 대한민국 국익은 물론 세계 평화를 위해 더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는 한나라당의 성명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반 장관 자신도 "국익 신장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고 화답하기까지 했다. '속세의 교황'이란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해낸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어느 정도의 기대를 품는 것은 어쩜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은 엄정 중립과 공평무사이다. 그래서 그가 가뜩이나 복잡한 한반도 문제를 다룰 때 공정하게 일을 하고도 한국 편을 들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부담을 느낄 가능성도 크다. 만일 그가 한국인들을 주변에 대거 포진하거나, 국내 업체의 편의를 봐주다간 나카지마 전 총장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 앞으로 유엔에 한국인 진출이 많아질 거라는 기대를 해서도 곤란하다. "최근 수년간 국내 젊은이들이 대거 유엔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한국인에게 배정된 쿼터가 거의 다 찼다"는 게 유엔 대표부 측의 설명이다.

유엔 본부 38층의 사무총장실에 입성하는 순간, '한국인 반기문'은 '세계인 반기문'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 한국인들은 그의 덕을 볼 생각보다 그가 성공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도울 생각부터 해야 할 것이다.

남정호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