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40주… 한국전의 기원과 성격 국제 학술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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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49년 3월 김일성에 “남침결재”/스탈린,미 대한입장 불투명하자 개입/중국 참전은 미의 국민당지원 저지책
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14일부터 개최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전쟁의 기원을 놓고 스탈린의 팽창주의를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남침을 강조한 전통주의 학설에서부터 「미제국주의」에 의한 북침설까지 있었으며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는 동서진영의 국제전으로,혹은 「민족해방전쟁」성격의 내전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규명을 중심으로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관계논문을 정리ㆍ요약했다.<편집자주>.
○한국전의 기원/존 메릴 미국무부 대외문제분석관
한국전쟁의 기원과 관련하여 북침설등 수정론자들의 입장이 한때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이제는 쓸모없는 가설이 되어가고 있다. 소련의 역사학자들조차 「글라스노스트」의 분위기에 힘입어 평양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솔직하게 지적하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은 남한내부에 있는 이승만반대자들과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방위군에 침투하여 이를 게릴라화 함으로써 쉽게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줄로 착각했으나 이같은 기도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수단은 「자신의 군대」뿐이었다.
북한이 소련에 전쟁지원을 구하면서 남한에서 대중봉기의 가능성을 역설했겠지만 스스로도 그것에 기대를 걸만큼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김일성은 49년 3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이때 분명히 남한공격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에 대한 청신호를 보내는데 주저했으나 6개의 보병사단,3개의 기계화부대,1백50대의 전투기를 무장시킬 수 있는 4천만달러 상당의 무기를 공급하는데 동의했다.
소련은 미국이 계획대로 남한에 원조를 진행할 것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트루먼행정부는 의회로부터 한국ㆍ그리스ㆍ터키의 원조프로그램에 대한 동의를 다음해까지 받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미국의 원조가 지연됨으로써 한반도에는 일시적인 군사적 불균형상태가 발생했다.
전쟁직전에 스탈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과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등으로 미루어보아 한반도에서 워싱턴이 비조직적으로 퇴각하는게 아니라 공산주의를 후퇴시키기 위한 「역공세」를 준비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공산주의견제를 위해 자원동원계획(NSC­80)을 이미 채택했지만 북한의 공격이 시작됐을 당시는 트루먼의 책상에서 계속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편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중국에 대한 카드로 활용할 의도가 있었다.
스탈린은 위싱턴과 북경사이에 적대감을 조성해 모택동이 계속 소련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권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이 살아있는 한 결코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공인할 수 없다. 이를 인정하게되면 영웅적인 자화상이 훼손되고 1백50만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개시의 죄를 자인케 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발간한 전쟁사 서적에서도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음을 인정하는 「모호한」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소련과 한국전/월리엄 스투웨크 미조지아대
북한이 50년 6월25일 새벽에 남한을 침공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한국전쟁의 기원과 과정에 관한 많은 부분은 아직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전쟁의 당사자격인 소련과 중국에서 자료가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주모자인 북한과 군사물자와 군사고문단ㆍ병력을 공급했던 소련과 중국의 참여로 시작됐다고 본다.
여러상황과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북한이 소련의 사전양해와 승인없이 38선을 넘어 대규모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초기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더욱 불확실하다.
그러나 중소의 동맹 관계로 볼때 중국내전에 참여했던 많은 조선인 병사가 이 전쟁에 참여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이 이 시기에 북한에 모험을 감행할 것을 부추겼는가 하는 점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소련은 당시 동서간의 팽팽한 긴장상태와 미국의 원자폭탄과 잠재적 기동력 때문에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소련은 당시 유럽상황으로 보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일치 단결시키는 조치라면 피해야할 입장이었다.
49년과 50년에 걸쳐 소련내에는 세계정세를 놓고 상반된 두 세력이 있었다.
몰로토프ㆍ수슬로프같은 강경파들은 프라우다지를 통해 미국은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소련이 유럽에 압력을 계속 가한다면 미국이 서유럽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린 이유는 ▲자신의 정권장악 및 유지 ▲주변공산정부들에 대한 영향력 강화 ▲미국의 주의력과 대유럽관심분산등의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불투명한 입장 역시 소련의 오판을 도왔다.
미국은 49년 한반도주둔 마지막 병력을 철수했고 애치슨당시 국무장관도 미국의 태평양방위체제에서 남한을 제외시켰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국내란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막기위한 직접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스탈린은 이같은 미국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남한이 위기에 당면해도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49년 3월께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참전결정/자이 지 하이 중국전략문제연구소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은 국민당정부를 후원하는 미국의 무력개입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50년 6월20일 1천4백만명의 인민해방군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김일성이 50년 4월 모스크바방문후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사를 통해 『군사적 수단으로 통일하겠다』는 사실만 들었을뿐 자세한 군사계획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전에 개입할 의도는 전혀없었으며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속해있던 한국계 중국군을 보내는 선에서 그치려고 했다.
전쟁발발직후 미국이 대만에 제7함대를 배치시키자 중국은 『미국이 중국내전에 참전할지 모른다』고 믿게됐다.
이에 따라 그해 7월10일 「미국의 대만 및 한국침략에 대한 중국인민위원회」가 설치됐다.
당시 모택동은 9월9일 동부군사지구 제10군에 압록강에 추가병력을 배치토록 지시했다.
주은래총리는 10월2일 당시 인도대사 파니카를 통해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에 대해 영국외무장관 포리스트 버빈은 인도의 네루를 통해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야 할 경우 압록강 40마일앞에서 멈추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미국은 두차례나 약속을 어겼고 맥아더가 타이베이를 방문하는길에서 한국전에 국민당군대 동원을 공개적으로 제시해 중국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당시 중국본토내에서는 국민당잔당의 활동과 지방의 사보타주나 소요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50년 10월1일 김일성은 불리한 전황을 알리고 인민의용군의 즉각 참전을 요구하는 전문을 모에게 보냈다.
북동부지역사령관 가오강ㆍ린퍄오(임표)는 처음에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장기적인 차원에서 어느정도 희생을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모는 10월2일 병력파견을 결정했다.
모는 10월13일 『김일성이 중국으로 후퇴하기전에 파병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따라 진격키로 결정했다.
소련은 50년말 공군 2개사단(전투기 2백대)을 파견,압록강철교와 1천㎞에 달하는 의용군보급로를 엄호했고 소련군 조종사들은 중국인민의용군 군복을 착용했으며 생포시 자신들은 중국계 러시아 소수민족이라고 말하도록 교육시켰다. 모는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팽덕회에게 『기습만이 조기승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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