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어질 독자외교의 영역/한소 정상회담의 의미와 과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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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세기에 가까운 시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한국 지도자가 소련 지도자와 자리를 같이했다. 우리는 이 만남이 앞으로 폭넓은 양국관계를 열어줄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시각에서 이를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그런 평가는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주변 외세들끼리의 흥정에 무력하게 운명을 맡겨온 한국이 드디어 국제무대에서 자체의 목소리와 의지로 능동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는 데서 주된 근거를 찾게 된다.
이번 정상회담을 적극 지원한 미국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이 소련 내부의 반발로 시들지 않도록 도와주는 한 수단으로 한소관계의 정상화를 밀어주고 있다. 이는 미국측 동기와는 상관없이 한국으로 하여금 독자적 외교역할을 확대시킬 기회를 갖게하는 것이다.
소련은 그들대로 한소관계및 경제교류확대가 난국에 처한 소련 국내경제에 숨돌릴 여지를 제공하고,또 그 과정에서 일본에 대해 대소접근을 재촉하는 경쟁심을 불어넣기 위해 한국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프리마코프 소련 내정담당고문이 『일본 기업인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한반도와의 경제관계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 말은 이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한국은 강대국 외교의 힘없는 대상이기보다 그 주체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중소관계에 있어서도 냉전시대에는 이 두나라의 경쟁관계를 역이용할 수 있는 균충자의 역할은 북한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관계가 국가관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신사고시대」에는 그런 역할이 한국쪽에도 넘어올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번영권에 동참하는 것이 중소 모두에 절실한 이상 한소관계의 급진전은 천안문의 두터운 벽에도 충격을 줄 것이 확실하다.
이제 새로 형성되고 있는 한국의 독자적 외교 역할을 어떤 비전과 의지로 활용하느냐는 문제가 노대통령과 외교 실무자는 물론 전국민이 풀어나가야 할 국가적 과제다.
1차적으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민족적 호기가 남북한 관계의 평화적 해결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북방외교의 성과가 북한 당국자의 고립감과 패배의식을 촉발하고 있다는 기미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당국으 이 점에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독일식 통합이 현재로서는 무망한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북쪽 제의가 비록 선전용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다 해도 이를 가능한한 진지하게 응대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북방외교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북한의 대일ㆍ대미 관계개선도 도와주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민족 공통체 통일방안은 그런 시각으로 볼때 이제 적극적으로 추진해볼만 하다고 본다.
한소관계의 정상화가 한국에 부여하게 될 외교 주체로서의 역할은 그 성공적 수행이 가져다줄 보상이 큰만큼 그 실패가 가져올 대가는 엄청나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독자외교의 기회는 주어졌지만 그 뒤에는 강대국 각자의 이익이 그대로 얽혀있다. 통일의 과업과 우리 실익을 주된 목표로 삼고 강대국의 상충되는 동기를 마찰없이 요리할 수 있는 고도의 정치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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