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관터서 전함유물까지 "생생"|인천에「로국영사관지」푯말 남아 러시아풍 진해우체국 외양 간직|한소정상회담 계기로본 국내 러시아 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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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소정상회담을 계기로 국내 각지에 남아있는 옛러시아의 발자취들이 관심을 끌고있다.
표트로 대제이후 끝없는 동방진출정책을 추진해 온 제정러시아는 19세기후반 마침내 한국과 국경을 맞대는 인접국가가 되었다.
이후 1900년 6월 한노조약체결로 공식국교 관계가 수립되며 한반도 곳곳에 러시아인의 진출이 시작됐다.
그러나 일본에 의한 전쟁패배로 한반도에서의 모든 기득권을 빼앗긴 이후 러시아의 자취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공식국교가 1904년 러시아공사관의 철수로 끊어진지 86년.
그 긴 시간동안 헐리고 부서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우리나라 각 지방에 남아있는 러시아 발자취를 살펴본다.
◇인천=1902년10월31일 인천으로 이전해 왔던 러시아 공사관이 1904년 로일전쟁 패배후 철수할 때까지 사용했던 흔적이「로국영사관지」라는 푯말 하나로 인천시 선린동에 국립검역소 인천지소 청사옆 공터에 남아있다.
당초 서울에 있었던 러시아 영사관이 이해 인천으로 이전, 인천시내동에 있었던 영국성공회부속병원옆에 청사를 임시로 정했다가 지금 골프연습장으로 사용되고있는 공터 (6백∼7백평규모)에 2층 목조건물을 지어 업무를 보았었다.
서울을 비롯, 인천·진남포·평양지역을 관할했던 이영사관은 로일전쟁 패배와 동시에 철폐되었고 그 건물은 1912년4월1일 체신국 인천출장소 (1915년엔 체신국 해사출장소로 개칭)로, 해방후에는 미군철도수송대 (R·T·O)사무소와 해군경비부등으로 사용되다 60년대 후반 헐려 현재 빈터로 남아있다.
한편 인천시립박물관에는 로일전쟁에 패전하자 자폭해버린 군함 코레츠(KORYETH)호의 유품인 닻·노끈·도르래 1점씩과 장총·포탄·포탄피·군함의 노 2점씩이 있으며 천으로 된 러시아국기 1점이 남아있다.
◇마산·진해=마산의 경우 당시 러시아가 함대용 석탄창고및 병원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매입한 마산시월영·반월동일대 30여만평의 부지가운데 4천여평이 80년대초까지 주인없는 땅으로 방치돼오다 82년7월에야 국유지로 환수, 살고있던 1백여 주민 41가구들에 불하됐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흔적은 마산인근인 진해시통신동 진해우체국.
1912년에 세워진 이건물은 일본인들이 러시아기술자를 동원해 지은것으로 건립후 우편소로 사용, 현재는 진해우체국금융창구로 사용되고 있다.
건평 1백36평규모의 단층인 이 건물은 당초 지붕을 동판으로 덮고 일조량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 지붕가운데 지름 1m정도의 유리를 끼웠으며 동판으로된 우체국 심벌마크를 붙였으나 우체국마크와 지붕유리가 없어지고 건물외양만 러시아풍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삼척앞바다=강원도삼척군원덕읍월천리앞 바다에는 지난 1904년경 로일전쟁때 일본함대에 격침된 러시아 발틱함대의 군함잔해가 오랫동안 전화의 아픔을 간직한채 깊은 바다물속에 묻혀있다.
당시 세계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발틱함대는 작전수행을 위해 대한해협을 거쳐 동해를 북상중 진해앞바다에서 잠복중이던 일본함대의 집중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고 그중 한척이 도망치다 삼척앞 해상에서 끝내 격침되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은 81년6월4일 오후3시쯤 월천리앞 1백50m지점 해저에서 해조류채취작업을 하던 잠수부 권용수씨(44)가 실탄·놋쇠파이프조각등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사실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삼척군과 항만청등 관계당국과 주민들은 잠수부를 투입, 인양작업을 편 끝에 선박기계에 부착된 놋쇠글자판 2점을 비롯해 러시아동전 4점, 안경·모포조각·주전자꼭지· 훈장·접시등 모두 2백24점을인양, 이중 11종 16점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이다.
가로17.5㎝, 세로 9.5㎝ 크기의 놋쇠글자 판에는 러시아어가 새겨져 있었다.
【지방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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