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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2. 경기 연천 전곡리 구석기시대 유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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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평강고원과 철원평야를 가로질러 연천 전곡리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한탄강은 우리나라 어느 강에서도 볼 수 없는 협곡천이다. 추가령 지구대를 타고 내리는 바람에 높은 절벽을 두 품에 끼고 들판 길 저 아래로 벼랑을 비집고 낮게 낮게 흐른다.

1977년 1월, 추운 겨울날 미군 제2사단 소속 그레그 보웬 하사는 군 영내 클럽에서 노래부르던 한국인 애인과 함께 이곳 한탄강유원지에서 데이트하다 커피나 끓이려고 돌멩이를 줍다가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 세점을 주워들고 놀라움과 환희에 찬 함성을 질렀다.

보웬은 미국 인디애나 대학 고고학과 3학년까지 다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입대해 동두천 미 공군 부대에 근무 중이었다. 그는 부대로 돌아와 나름대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유물사진과 함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스의 보르드 교수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얼마 뒤 보르드 교수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만약 이것들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나는 의심없이 아슐리앙 문화의 석기라고 말하겠습니다. 내 자신 직접 현장을 보고 싶은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여건상 불가능하니 서울대학교 고고학과로 연락해 보십시오."(이선복, '고고학이야기')

그리하여 보웬은 그 해 4월 15일 휴가를 얻어 서울대로 찾아갔다. 고 김원용 교수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유적지를 확인하였고, 이내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이듬해(1979) 4월부터 서울대(김원용).영남대(정영화).경희대(황용훈).건국대(최무장)등 구석기 전공자들이 모두 참가한 대학합동발굴단이 이후 10년간 발굴하게 되었다. 총 실무 간사는 배기동 교수(한양대 박물관장)였다.

발굴 결과 전곡리 유적지에서는 엄청난 유물이 수습되었다. 지표에서만 약 1천 점, 발굴과정에서 약 4천점의 구석기시대 뗀석기(打製石器), 그것도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아슐리앙 주먹도끼들이 수습된 것이다.

아슐리앙 주먹도끼란 프랑스의 생 아슐 마을에서 유래한 구석기 문화의 한 형태로 위는 둥글게 다듬고 아래는 뾰족한 날이 서도록 깎으면서 날 옆면은 우둘투둘한 날이 겹겹이 서도록 돌 둘레를 쳐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동물의 가죽을 벗겨 내는데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아슐리앙 주먹도끼의 제작 기술은 약 1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처음 나타나 유럽.근동.인도까지 퍼져 갔다. 그러나 동아시아 쪽에서는 이것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자바의 직립원인, 중국 주구점(周口店)의 베이징원인 등은 주먹도끼가 아니라 이른바 '찍개'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석기 문화는 보통 아슐리앙 주먹도끼와 찍개 문화로 분류하는데 전곡리 유적은 이 세계 고고학지도를 완전히 새로 그리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리하여 세계 고고학지도에는 서울은 없어도 전곡리는 표시되고 있으며, 그 연대는 학자간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근래의 화산재 측정으로 20만 내지 30만년 전으로 보고 있다.

지금 전곡리 유적지 발굴 현장은 모두 흙으로 덮여있고 그 위에 야생초 꽃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입구엔 구석기 전시관이 있어 문화유산해설사가 이 모든 내력을 자세히 얘기해주며, 구석기시대 인물과 집을 실물대로 재현한 것도 있다. 또 매년 5월 5일이면 연천군이 주관하는 구석기체험 학습장이 열린다. 그러나 이 유적이 지닌 진짜 의미는 인간 선조의 그 고단한 삶의 자취가 우리에게 무언으로 전해주는 사뭇 진지하고 숙연한 생명의 교훈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99%의 시간을 구석기 시대로 보냈다. 지금 인간의 역사는 4백50만년, 줄여 잡아 2백50만년 전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불과 1백여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6천년 정도로 생각해왔다.

17세기 영국의 신부 토머스 어셔는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자손의 족보를 역으로 제산하여 BC 4004년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유인원으로부터 스스로 진화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결국 인간은 자연계의 한 생명체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도전하고 나아가 자연을 개조하면서 아울러 자기 자신도 진화시켜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인간은 인간이 만들었다(Man makes himself)"는 선언까지 하였다.

구석기인들은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며 생의 본능적 의지로 사냥하고 열매를 따먹으며 살아갔다. 그들은 도구의 제작,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지식 습득이라는 구석기 나름의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 석기공작과 지식의 축적과정은 무척 진도가 느리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길고 지루한, 때로는 생명을 앗아가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신석기혁명도 산업혁명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독버섯을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은 그것을 먹고 죽어본 경험의 산출이다. 구석기시대는 결코 문명의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전곡리유적 발굴 10년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10년 발굴에 노총각 신세를 못 면할 것 같던 배기동 교수는 취재 온 여기자와 눈이 맞아 배필을 구했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TV에서 발굴현장을 보고는 "저기 좀 도와 주라"고 지시해 비서실장이 발굴현장에 긴급출동하고는 특별후원금을 내려준 일이 있다. 그 돈으로 지금도 남아있는 조립식 숙소건물을 지은 것이다.

그때 기분이 한껏 좋아진 김원용 교수는 한탄강 매운탕 집에서 실컷 술 마시고 차를 몰아 서울로 와서 또 2차 술을 마시고 마침내는 남의 차를 들이받아 경찰서로 연행됐다(김원용, '고고학 자전적 회고'). 고 김원용 교수는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해는 전곡리 한탄강에 뿌려졌고 발굴현장엔 제자들이 세운 까만 돌로 만든 추모비가 이 유원지를 지키고 있다. 올 11월 14일은 선생의 10주기 되는 날이다.

그리고 전언에 의하면 보웬 하사는 귀국 후 애리조나대학에서 고고학 석사학위를 받고 발굴 전문회사에 취직해 한국인 아내와 자식들과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유홍준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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