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망령서 벗어나려면…/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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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러시아제국이 세계 최강임을 자랑해왔던 발틱함대가 동향평팔랑이 이끄는 일본함대에 의해 대마해엽에서 전멸당했다. 1905년 5월의 일이었다. 일본 해전사에서 영광의 기록으로 길이 전해지는 이른바 「일본해 해전」이 있은 그해,노일전쟁을 끝맺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이뤄지고 일본은 조선을 「지도ㆍ보호ㆍ감독」할 권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면서 그 3주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게 된다.
부동항을 찾아 제국의 남진을 노렸던 러시아와 대륙의 진출을 부단히 갈망했던 일본이라는 두 제국의 각축 결과가 우리의 망국사였다는 케케묵은 과거사를 왜 이자리에서 다시금 되돌아 보는가.
노대통령의 방일로 한일간의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가 설정되고 일왕의 방한까지 거론되고 있는 지금,역사상 처음으로 한소간의 정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리를 함께 하면서 한소수교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서 있는 지금에 와서 왜 경망스레 노일전쟁의 역사적 망령을 떠올리고 있는가.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국제정세가 구한말의 여러 정황등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지난 역사의 망령을 떠올리게 된다.
금세기초에 일어났던 제국의 해체와 재편의 유형이 금세기 말인 지금에 와서 유사한 형태의 해체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서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구에서 소련의 통제가 약화되고 민주화혁명이 몇달사이에 동구전역을 휩쓸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의 실질적 통일이 눈앞에 벌어졌을 때,그것은 우리에겐 소망스런 일로 보였지만 서구국가들엔 공통된 위협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들 또한 역사적 망령에 시달리고 있기는 마찬가지 였던 모양이다.
그들도 합스부르크왕가의 해체와 함께 소수민족의 독립과 영토전쟁이 잦아지고 국제관계의 힘의 공백을 뚫고 솟아난 신흥제국 독일이 제국의 꿈을 실현하려 했던 1차세계대전 전화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고 러시아와 독일을 견제하지 못한 그 이유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다시 일어났다는 역사적 망령이 그들 머리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 정상회담장에서는 독일이 나토에 가입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줄다리기가 계속될 것이다. 독일의 통일이 유럽의 통합을 가속화시키고 있고 또 독일을 나토에 가입시켜야만 유럽인들도 그 역사의 망령에서 벗어나 다리 뻗고 잠을 잘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소련쪽에서 본다면 그동안 유럽과 소련의 완충역할을 해주었던 동독과 동구국가들이 유럽체제속에 통합되어버릴때,진망치한의 위기감을 맞을 것이므로 통일독일의 나토가입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소련과 유럽국가들이 힘의 줄다리기에 여념이 없고 미국과 캐나다는 긴밀한 협력체제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으며 동북아에선 이미 사실상 경제적 제국을 형성한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할 수 있는 대륙진출의 금의환향을 꿈꾸고 있는 오늘이다. 어찌 지난날의 망국의 망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다음,바로 이러한 역사적 망령이 떠오르면서 이어지는게 우리네의 피해의식이고 그 피해의식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도전적이고 전향적인 자세가 아니라 퇴영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동구혁명이 완료된 지난해말,독일의 디 차이트지가 주최한 「대토론­동구혁명」(「세계의 문학」 여름호 게재)을 읽노라면 그 자리에 참석한 세계의 석학과 경륜가들이 비록 그러한 역사적 위기의식에는 동의하면서도 새 세기를 여는 유럽통합에의 길에 모두가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세기말적 위기상황을 역사적 망령에 사로잡혀 소극적으로,퇴영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과 개방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는 적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부러움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높아만가는 한일간의 기술장벽과 해마다 쌓여지는 50억달러에 가까운 대일무역적자를 지켜보면서 「통석의 염」이라는 야릇한 수사에 집착하는 그들의 오만속에서 다시금 역사적 망령을 되살리기는 하지만,그 역사적 망령에 묶여 오늘과 내일의 삶을 또다시 퇴영적이고 소극적인 배타적 자세로 살 수 없음이 달라져 있는 오늘의 세계환경이다.
역사적 망령을 되살리면서도 그 울분을 내연화시키고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그 망령의 늪에서 벗어나야 하는게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달라진 생존방식이다.
결국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한반도의 주변정세속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다시금 역사적 망령에 시달리는 우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할 일은 하나 밖에 없다.
우리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고 다지면서 자강의 길을 굳혀가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개방과 협력이라지만 우리 자신의 힘이 없고서는 대등한 관계의 개방과 협력이란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이뤄질 수 없다. 힘이 없는 개방과 협력은 종속과 합병의 종말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자강하고 어떻게 결속력을 제고할 것인가. 쓸모없는 국론분열,당파간ㆍ계파간의 정쟁이 자강을 해치고 결속력을 무너뜨린다.
14%의 지지율 밖에 없는 거여가 73%의 의석만을 믿고 내각제를 향한 숨바꼭질의 곡예에 골몰할 때,일관성 없고 원리ㆍ원칙을 편의에 따라 바꾸는 불안한 경제정책을 정부가 펼 때,자강은 약화되고 결속력은 흩어진다.
합당ㆍ거여의 목표가 집권의 연장이 아닌 개혁목표의 구국적 차원이라면 그에 합당한 개혁의 실천을 가시화해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앞에 닥쳐올 온갖 비관적인 역사의 망령이 되살아난다 해도 우리 내부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힘차게 솟구치고 자강과 결속의 전진적 자세만 갖춰있다면 그 망령은 우리곁에서 혼비백산 도망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논설위원〉PN JAD
PD 19900602
PG 05
PQ 04
CP HS
CK 04
CS A02
BL 1109
GO 취재일기
GI 한남규
TI 「들뜬」서울과 「조용한」모스크바/한남규 워싱턴특파원(취재일기)
TX 4일 열릴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을 놓고 서울과 모스크바의 태도가 퍽 대조적이다.
노일전쟁 이후 맞는 한소간의 최대 국면전환이라는 지적들이 결코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번 회담이 괄목할 일은 어느 쪽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 역사성뿐 아니라 장차 파급될 영향 또한 엄청날 것이라는데도 양측이 같은 의견일 것이다.
서울에서 회담을 앞두고 조성되고 있는 흥분된 분위기가 5공초를 상기케 하는 점도 없지 않지만 이번 회담의 중대성을 감안할때 그것을 이상하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스러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련쪽 태도를 보고있노라면 우리쪽도 흥분을 다소 자제하고 가다듬어야할 구석이 없지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소 정상회담 이틀째인 31일 워싱턴의 조지워싱턴대 강당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미소 양쪽 대통령 대변인이 공동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거론됐다.
▲기자=마슬레니코프 소 대변인에게 하는 질문인데,노­고르바초프 회담에 관해 말해주십시오.
▲마슬레니코프=노 코멘트가 내 대답입니다.
그게 전부였다. 브리핑후 별도로 던져진 관련 질문들에 대해서도 그는 한결같이 묵살했다. 이같은 소측의 태도는 비단 마슬레니코프 대변인 뿐 아니라 타스통신 등 소언론도 비슷했다.
심지어 고르바초프를 수행하고 있는 소기자들은 그들 정부는 아예 확인조차 않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곡절끝에 31일 오후 공식발표를 하게된 것도 고르바초프측이 이날 워싱턴에서 OK통지를 해준데 따른 것이라는 우리 주미대사관 설명을 감안하면 더욱 눈길을 끄는 모스크바 자세다.
소련의 대한 관계전환 동기중에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그들의 역할 확대와 서울로부터의 경협모색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자국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냉엄한 이해관계가 바탕이다.
이 목표로 옮겨가는 교량을 그들은 아시아의 대표적 공업국 일본과 한국중 서울쪽에 건설하려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한국카드」를 모스크바가 쓰고 있다는 견해들이 있지만 한국의 국력과 비중이 커지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결정이다. 한소 정상회담은 한국의 성장이 그 근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계속 흥분에 들떠 의연함을 잃지 않을까 우려된다. 차제에 따질 것은 따지고 짚고 넘어갈 일은 짚어야 한다는 자세를 가다듬는게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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