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북한 「세불리」 벗어나기/「단계적 군축안」 왜 나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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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논란많은 콘크리트장벽 언급 안해 눈길/한국정부 대응따라 새 돌파구 열릴 수도
북한은 한소 정상회담의 발표와 때를 맞춰 돌연 한반도의 비핵지대화,상호대규모군사훈련금지,10만명 수준으로 병력감축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계적 군축안을 내놓았다.
이번 제안은 북한이 88년 11월 이미 제의한 바 있는 한반도 평화보장 4원칙과 포괄적 평화제안을 다듬은 것으로 그 내용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다만 이번 제안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북한이 입버릇처럼 되뇌던 남북한,미국간의 3자회담,또는 3자 군사회담을 철회하고 남ㆍ북한간에 군축협상을 개시하자고 주장한 점이다.
북한이 이같이 태도를 바꾸게 된 데는 노ㆍ고르바초프회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은 최근 미군유해 송환등을 위해 최근 미국과 접촉해 본 결과 미국이 북한이 주장하는 3자회담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데다 소련까지 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당사자간의 대화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임을 깨닫고 이같은 불리한 여건을 군축협상 제의를 통해 바꾸어 보자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제안내용에 새로운 것이 없고 다만 「3자회담 이전에라도 남북이 협상을 하자」고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번에 제안된 ▲외국군과의 합동군사훈련,사단급이상 규모및 군사분계선 일대에에서의 군사훈련 금지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군사당국자간의 직통전화 설치 등은 모두 88년 제안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또 군비통제와 남북한간에 발생할지도 모를 군사분쟁 협의를 위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책임자 각 군총참모장)를 구성,운영하자는 제의도 74년 11월8일에 열렸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 63차 확대회의에서의 허담(당시 외교부장)이 이미 「남북공동군사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한 적이 있는 내용이다.
다만 핵무기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전과 달리 눈길을 끄는 대목이 없지 않다.
북한은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촉구하며 ▲한반도내에서의 핵병기 생산 ▲핵병기를 적재한 외국의 항공기ㆍ함선이 한반도영내로의 「출입」과 「통과」를 금지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북한의 이 제안은 단지 미국뿐 아니라 소련까지도 포함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이미 소련에 원산ㆍ남포항의 사용권을 주었고 북한영공항행권까지 허용하고 있어 이같은 제안을 한 배경에는 소련의 군함이나 항공기가 북한을 이용하는데 어떤 제동을 가할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자아내고 있다.
이번 북한의 제안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걸음을 내디딜 수도 있다.
군축제안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북한이 한소정상회담이 발표된 뒤 수시간만에 남북회담 북측대표단 연합회의를 열어 남북대화 재개의사를 밝히면서 금년들어 계속 강조해오던 콘크리트장벽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점도 주목된다. 이는 북한이 주변의 불리한 여건을 남북평화공세로 극복해 보자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소 정상회담을 우리가 북한을 주변에서부터 죄어나가자 북한은 다시 「단계적 군축안」으로 되받은 인상이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의 진의여부를 떠나 북한이 일단 우리쪽의 안인 당사자간의 회담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비록 북한이 선진적인 차원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북한의 이같은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서는 남북관계에 어떤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유영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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