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 밀사외교 두달 고르비도 보안당부/「샌프란시스코회담」 있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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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 KGB창구 통해 추진/소 거물급 내한 구체협의/장소 진통 「방일」 직전 미로 낙착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까지에는 미수교국간 교섭이라는 어려움 때문에 양국 정부간 2개월에 걸쳐 철저한 비밀속에 밀사외교가 펼쳐졌었다.
○4월7일 접촉특명
○…한소 정상회담이 처음 거론된 것은 지난 4월7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5월30일 워싱턴을 방문해 31일 미소 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외신보도가 있자 노태우대통령이 노재봉 비서실장과 김종휘외교안보보좌관을 불러 한소 정상회담이 이뤄지도록 교섭하라고 지시함으로써 한소간 막후접촉이 개시됐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대화에 불응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푸는 최선의 길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소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는 것.
이때부터 청와대 외교팀은 철저한 보안속에 막후접촉의 길을 모색.
○박철언씨 역할 관심
○…제일 처음 막후접촉에 나선 것은 김종휘보좌관이었다. 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노재봉·김종휘팀은 서울의 그레그대사및 미 CIA핵심인사를 상대로 타진에 들어갔다.
미국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고 적극 돕겠다는 입장이었다. 워싱턴과 연락을 취한 결과 『한국과 고르비를 돕는 일이라면 적극 협조하라』는 회신이 왔다는 것이었다.
이제 소련과 직접 교섭에 나서는 일이 문제였다. 이 단계에서 박철언전정무장관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88년 여름 모스크바를 밀행,소련의 서울올림픽 적극참여와 한소 영사처 교류를 타결했던 그는 동경을 중심으로 소련과 비밀창구를 갖고 있었다. 그 창구는 박씨 개인의 창구라기 보다 그가 대통령 정책보좌관시절 노대통령의 밀명을 받아 정부대 정부베이스로 설치한 통로이며 소련정보기관인 KGB계통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전장관은 노대통령으로부터 우리의 의사를 소련측에 정식통고하고 설득하라는 명령을 받고 4월26일 동경으로 떠났다. 그는 정책보좌관시절 청와대의 북방외교담당비서관이었던 염돈재씨(안기부부국장)를 동경으로 불러 예의 「동경창구」에 노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모스크바에 갔다와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이 업무만을 수행하고 박전장관은 염씨를 동경에 남겨둔 채 유럽쪽으로 떠났다.
그러나 4월말 국내에서 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되는 증시폭락·부동산투기등 경제문제가 대두돼 노대통령은 일본만 방문키로 계획을 수정,5월4일이 사실을 발표케했다.
이같은 계획수정이 국내사정으로 어쩔 수 없게 되자 김종휘외교보좌관은 휴가를 빌미로 5월1일부터 3일간 미국을 방문해 소련측과 접촉,순방외교 일정수정의 불가피성을 소련측에 통보하고 별도로 노대통령의 방미와 한소 정상회담추진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월17일 OK급보
○…노대통령의 방미 계획이 취소되고 청와대가 방일에 앞서 일왕의 사과수준문제에 온통 매달려 있던 5월17일 갑자기 동경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동경의 소련 「창구」가 서울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재봉비서실장은 대통령 방일수행계획을 취소하고 소련건에만 매달렸다. 동경 창구는 청와대를 방문,노실장과 김종휘보좌관에게 고르바초프대통령의 OK회신을 전하고 구체적 협의에 들어갔다.
회담장소와 시기가 문제였다.
시기는 고르바초프의 방미 기간에 한다는데 쉽게 합의했으나 장소에 있어 우리측은 방미 계획을 취소했다가 또 미국에 간다는 것이 어색하다는 이유로 다른 제3의 장소를 제의했으나 소련측은 미국밖은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명.
장소가 타결된 것은 노대통령 방일직전이었다. 동경 「창구」가 아닌 모스크바의 「거물」이 5월23일 서울로 직접 날아와 미국이 아니고는 물리적으로 곤란하다는 이유로 샌프란시스코로 낙착짓고 정상회담의 의제,한소 수교스케줄등을 깊숙히 논의했다는 것.
이 「거물」이 71세의 소련공산당 고위인사라는 설,또는 5월23일 전직수반회의에 참석한 도브리닌 전주미대사라는 설이 있다. 아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르바초프의 핵심측근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마 KGB의 핵심간부가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있다. 이 거물은 노대통령과도 직접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소,손성필에 통보
○…한소간에 정상회담 합의가 이뤄지고 나서부터 청와대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며 구체적 작업에 돌입.
김종휘외교보좌관은 전부하직원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놓고 함구령을 내렸으며 노대통령의 방일시에도 일체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일 수행팀에 주의를 촉구.
청와대는 방일후 귀국하자마자 이병기의전비서관을 28일 미국에 급파,사전준비토록 했으며 29일에는 이정빈외무부1차관보를 보내 소련의 방미팀과 접촉,발표날짜·발표방법등을 협의.
소련측은 정상회담 발표날짜에 무척 신경을 써 처음에는 노대통령이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인 6월3일로 고집했다가 우리측이 국내언론 보도문제를 들어 난색을 표명해 1일이나 2일 하기로 잠정 합의.
이처럼 소련측이 발표날짜에 신경을 쓴 것은 31일의 미소 정상회담이 언론보도에서 훼손되지 않았을까라는 염려때문이었다는 청와대측 설명.
그러나 일본등 외신들의 보도가 퍼져나가고 일부 한국언론들이 청와대측의 엠바고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소 정상회담사실을 보도하자 소련측과 재접촉,결국 31일 오후 3시(한국 시간) 발표키로 확정.
발표시점에 대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한국측에 철저한 보안요청과 함께 양국간 합의에 의해 해줄 것을 특별히 당부했었다고 청와대는 설명.
한편 소련측은 지난 28일 고르바초프가 방미를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기 직전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손성필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를 불러 귀띔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규진·문일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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