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3. 대학원 진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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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면서 깊게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공부를 하긴 하지만 '과연 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졸업은 다가왔고 취직을 해야 했다. 더 이상의 궁핍은 견디기 힘들었다. 마지막 학기에 텍사스주 신문사마다 일자리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작은 시골 신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학생 때 학생회관에서 조그만 사진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다. 고교 시절 개인전에 출품했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댈러스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전시기획자)가 우연히 그 사진들을 보고 전시회를 주선해 댈러스 현대미술관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그 전시회가 경력으로 인정되었는지 '댈러스 모닝 뉴스'로부터 졸업 후 사진기자로 일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지방 신문이지만 텍사스주에서는 가장 큰 신문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직장을 얻어 가난에서 벗어날 발판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펜서 교수는 나의 취직에 반대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그보다 훨씬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속이 탔다. 도박장에서 오물을 만지며 돈을 벌어 겨우 졸업하고, 마침내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대학원에 가라니….

당시 미국에서는 대학만 졸업해도 학력은 충분했다. 언론사 채용 기준에서도 학력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경력과 실무능력이 더욱 중요했다. 그런데도 스펜서 교수는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네 같은 사람은 미주리 대학원의 이덤 교수에게 가서 더 배우는 것이 좋겠어. 꾸준히 성장하자면 대학 졸업만으로는 부족해."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재학 중 그는 나의 솔직함과 순수함.열정을 눈여겨보고 아껴주었다. 그가 가라는 길이라면 힘들어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능력은 아직 미완성 상태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어도 일상생활에는 불편이 없었지만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영어로 글을 쓰자면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분석능력이 필요했다. 결국 시간이 흘러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스펜서 교수는 나의 주머니 사정을 듣고 미주리 언론대학원의 장학금과 조교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미주리 대학원을 다니면서 경험한 세상에 비하면 '댈러스 모닝 뉴스'는 시골 신문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고비마다 항상 은인들이 나타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부모님과 이명동.정도선 선생, 다우링 대사, 레스터 편집인, 스펜서.이덤 교수 그리고 도박장의 프랭크까지….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김희중 갤러리

들에서는 추수가 한창이고 초가 마당의 빨간 고추가 풍요를 더해주는 계절. 논두렁에서 단발머리 소녀와 마주쳤다. 대바구니를 옆에 끼고 벼 이삭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소녀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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