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 스파이들 '연애 공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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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독일 통일 16주년(3일)을 맞아 옛 동독 첩보기관인 슈타지(국가보위부)의 활동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보고서가 나왔다. 베를린 자유대학 부설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 체제 연구협회'는 '서독에서의 동독 간첩활동의 실태와 서독 정부의 대응 조치'란 제목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은밀하게 파묻혀 있던 동독의 서독 내 첩보활동의 전모가 학술적으로 상세하게 분석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연구자들은 관련 자료들을 연구 목적으로만 제한적으로 열람할 수 있었기에 이 분야 연구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보고서에는 동독을 위장 탈출해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동독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귄터 귀욤 외에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파이들이 새로 소개됐다.

◆ 비서.대학생은 주요 포섭 대상='비서나 대학생 같이 현재보다는 미래에 간첩으로서 활용 가치가 높은 서독인을 집중 포섭하라.'

슈타지는 연방의원이나 각료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고위직 인사들을 가장 선호하긴 했지만, 앞으로 주요 인물의 비서가 될 수 있는 젊은 비서나 대학생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능력 있는 학생들을 포섭하기 위해 서독의 각 대학을 담당하는 슈타지 전담 부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순진한 이상주의자였던 서독 대학생 라이너 룹은 1960년대 말 슈타지에 포섭됐다. 그는 동베를린에서 사상과 첩보 교육을 받은 뒤 '토파스'라는 암호명을 쓰는 동독 간첩으로 변신했다. 슈타지의 도움으로 브뤼셀에서 유학한 뒤 영국 군사고문단에 취직했다.

그러곤 의도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근무할 영국 여성에게 접근해 결혼한 다음 부인을 통해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벌였다. 슈타지는 그를 통해 나토가 80년대 말 바르샤바 동맹국에 대해 파악했던 모든 정보와 나토 회원국의 군사력 정보까지 넘겨받았다. 당시 룹의 정보활동으로 동독과 소련 등 바르샤바 동맹국은 서독과 나토의 군사 역량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 미남계도 적극 활용=슈타지는 또 비서직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애공작'을 펼쳐 정보원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미남 공작원의 사랑 공세에 속아 넘어간 세 명의 여비서 간첩단 사건이 이번에 뒤늦게 밝혀졌다. 서독 여성 게르다 오는 동독 공작원 슈뢰터의 '미남계'에 넘어가 정보원이 됐다. 그녀는 수년 동안 독일 외무부 속기사, 바르샤바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으로 근무하며 500건이 넘는 서류를 남편을 통해 동독에 넘겨주었다.

다그마라는 여인도 비슷한 방법으로 슈뢰터에게 포섭된 뒤 75년 서독 총리실 비서로 취직했다. 그는 77년 체포될 때까지 수시로 정치 담당 부서의 기밀문서를 슈타지로 빼돌렸다. 나토 본부에서 일하는 마가레테라는 서독 여인도 슈타지의 지령을 받은 동독 배우 롤란드에게 유혹돼 정보원이 됐다. 롤란드는 덴마크 방위청 장교로 신분을 속인 뒤 이 여인을 통해 정보수집에 나섰다.

스스로 동독의 첩자가 되길 자원했던 부류도 있다. 서독 첩보 당국에 근무했던 첩자 클라우스 쿠론은 금전적인 욕심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조직을 배반했다. 그는 서독이 80년대 동독 정보기관에 맞서 수립한 모든 방첩작전에 관한 정보를 슈타지에 넘겼다.

◆ 관대한 사법처리=통일 뒤, 과거 동독 정보원들의 간첩활동에 대한 사법처리 수준은 분단 시절보다는 관대했다.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수사과정과 형사소추 과정에서 모든 상황을 참작해야 했다. 예컨대 독재체제 하에서 국가의 명령에 따라 행해진 첩보활동을 과연 처벌해야 하는지를 평가하고, 사법처리에 관한 여론의 동향까지 판단의 자료로 활용했다.

통일 직후 연방검찰청으로 넘어온 1553건의 서독 내 동독 간첩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법처리의 강도가 약해졌다. 사법부는 이 가운데 1150건을 기각했다. 또 245건은 벌금형으로 처리했다. 대다수 경미한 간첩활동은 법정 시효가 지났고, 벌금형이 내려진 사건은 기소중지돼 법정소송으로 간 경우가 드물었다. 반란죄와 관련된 사건들만 형사처벌 대상이었다. 하지만 반란죄로 처벌된 사례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 슈타지(Stasi)=옛 동독 첩보기관으로 정규직원 9만4300명에다 17만4200명에 이르는 비공식 끄나풀, 정보원을 거느린 공룡 조직이었다. 서독 내 슈타지 간첩단이 서베를린과 당시 연방 수도인 본에 암약했고, 최대 인구가 밀집해 있었던 서부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에 집중돼 있었다. 통일 전까지 40여 년간 3만여 명의 비밀요원이 적발되지 않고 고정간첩으로 활약했다. 동독 내에서도 주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 악명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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