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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권 외교 주도권 '잃어버린 5년' 되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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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일본 총리가 취임 후 12일 만에 인접국 정상 외교에 나선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8일께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유산인 '잃어버린 아시아 외교 5년'을 하루빨리 복원하라는 나라 안팎의 주문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고이즈미는 취임 두 달 후 미국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 중국, 의외로 부드럽게 나와=당초 아베는 첫 행선지로 한국 방문을 추진했다. 노 대통령의 '직설 화법'이 좀 부담스럽긴 해도 대화로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반면 후진타오 주석을 첫 상대로 하기엔 역시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이 총리실 주변의 분석이다.

그런데 "정상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하라"고 요구했던 중국 정부가 의외로 타협점을 제시했다. 야스쿠니(靖國) 참배 여부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는 대신 "식민지 지배로 큰 고통과 손해를 끼쳤다"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를 토대로 "나는 이 같은 역사에 겸허하게 임할 것"이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는 선에서 양보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일 회담이 먼저 확정됐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7일 열자고 제의했으나 한국 측이 추석 연휴라 곤란하다고 하자 9일로 다시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중국의 입장이 완화됨으로써 한.일 정상회담도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다고 한다.

한편 반기문 장관과 아소 다로(生太郞) 일본 외상은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위해 2일 오후 15분간 통화했다. 일본은 정상회담에서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 강제로 수용된 한센병 환자에 대한 전원 보상 방안도 제시 여부를 검토 중이다.

◆ "정상회담 빠를수록 좋다" 판단=아베 총리는 취임 전부터 한.중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내비쳤다. 고이즈미가 남긴 유산 중 '꼬일 대로 꼬인 아시아 외교'를 큰 짐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임 순간까지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 고이즈미와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인접국과의 외교 복원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애초 한.일, 중.일 정상회담은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장에서 추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베는 서둘렀다. 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고이즈미 때문에 정상회담을 열지 못한다는 한.중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의 이런 판단은 동북아 외교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취임 인사차 방문하는 과정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 인식 문제 등 예민한 사안을 '전임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일 외무성의 한 관계자는 "한국.중국 정부도 일본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전했다. '조기 개최'에 대한 서로의 필요성이 이심전심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또 아베 총리로선 22일 실시되는 2개 선거구의 중의원 보궐선거를 의식한 측면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와는 달리 압도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아베 정권으로선 취임 후 첫 선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아베, 부메랑 맞을 수도=일본에선 벌써 "가장 먼저 득을 보지만, 결국 나중에 가장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이는 아베 총리"란 분석이 나온다.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 정상회담을 할 경우 국내 지지도는 높일 수 있겠지만, 그 뒤 야스쿠니를 가야 할 상황이 생기게 되면 한국.중국과의 관계 악화 책임이 아베에게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을 경우에도 "한국과 중국에 밀렸다"는 보수층의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일본의 한 의원은 2일 "야스쿠니에 대한 '모호한 전략'이 한국.중국과의 회담을 성사시켰는지는 몰라도 장차 더 큰 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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