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0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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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5ㆍ10총선 국민들 적극참여/남로당의 거부는 실책… 차츰 자멸의 길로
심산 김창숙은 언제 만나봐도 대쪽같이 단단하고 확실한 분이었다.
나는 『어르신의 심경은 어제 아드님 형기한테서 대강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남에 이승만정권,이북에 김일성정권이 들어서버리면 제 생각으로는 남북통일은 어렵다고 봅니다.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고 물었다.
나도 당의 지시로 심산을 설득하러와서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고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궁금했다.
심산은 나의 물음에 대답이 없었다. 눈을 감고 괴로운 상을 짓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는 『이남지사들이 소련의 괴뢰인 김일성과 연합해 미국과 우남을 반대하면 도리어 그들을 유리하게 해주는 것이네. 박헌영이나 자네나 일제시대 독립운동한 것은 내가 들어 알고 있네. 그러나 공산당은 소련 앞잡이라 여겨져 나에게는 가치가 떨어졌네. 만일 백범이나 내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 밑에 뭉쳐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면 미국은 전힘을 다해 우남을 밀고 단정을 수립하고 말걸세.
우리 이남지사들이 소련 및 김일성과는 연결을 맺지말고 우리끼리 단결해 나가면 비록 일시적으로 우남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며칠못가네. 이남만이라도 진실로 선정을 베풀면 이북의 김일성정권은 오래못가네. 민심이 천심이고 민심은 선정에 따르는 것이며 또 선정도 민심에따르는 것이네. 이번에 백범이나 벽초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오면 그사람들의 반은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를 설득하러가서 도리어 설득을 당하고 돌아온 셈이 되고 말았다.
김일성을 잘 모르는 김창숙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또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이튿날인가 김구가 북한에 대해 남북연석회의를 열자는 서한을 발송했다.
물론 5ㆍ10총선에 반대해 남북연석회의를 애초에 추진한 것은 남북노동당이었으나 백범도 남한에 이승만 단독 정권수립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남로당 이론 연구진에서는 5ㆍ10선거 반대투쟁을 하기는 하나 최종단계에 가서는 못이기는 체하고 선거에 참가하는 것도 어떠냐는 소수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박헌영을 이북에 인질로 뺏긴이상 못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노력인민」 사내에서 5ㆍ10총선 참가론을 한번 띄워봤다가 원칙론자들의 총반격을 당하고 만 일이 있었다.
그때 남로당을 위시해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임정요인과 유림 장건상 등 쟁쟁한 인물들이 통일전선을 구성해 선거에 참가했더라면 이승만정권 수립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남로당의 조직은 그런대로 상당했다. 5ㆍ10총선때의 예를 들면 경북 청도군에서 입후보한 박모란 사람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 남로당이 총선에 보이콧했으니 청도군내의 남로당 표를 자기에게 몰아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했다. 박은 동경유학시절의 친구이며 퍽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혀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도 한 일이 없는 무명의 사람이었다.
나는 당론으로 보이콧을 결정했는데 개인적으로 어떻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냐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또 사람을 보내 남로당 청도군당 위원장 노모가 중앙의 박갑동이 개인적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협력해 주겠다하니 친필로 내이름 석자라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한가지 계책을 가르쳐 주었다.
내서명을 받아오다가 경찰의 수색을 당해 찢어없앴다고 한뒤 내가 지원해주라고 했다고 하라고 시켰다. 그랬는데 그 박모가 예상을 뒤엎고 당선했다. 그는 국회의원을 했기 때문에 6ㆍ25때 납북당하고 말았다.
5월10일 나는 한복을 입고 서울시내 투표장을 돌아다니며 내눈으로 투표상황을 관찰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대중의 손으로 투표해 자기정부를 수립하는데 보이콧 할 사람은 그리 없었다.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남로당의 5ㆍ10총선 보이콧정책은 완전히 실패라는 것을 나는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남로당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협박에 이기지 못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그때 내눈에 환히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벌써 남로당의 핵심에 들어가 있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빠져나온다면 조직의 배신자가 되며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남로당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협박에 못이켜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김구는 왜 김일성과 만나 목숨을 잃게 되었는가. 47년 봄부터 정세가 어수선해 나는 경교장출입을 그만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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