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할리우드 법정 드라마처럼 세상을 흔든 미국의 재판 생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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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상을 바꾼 법정
원제: And the Walls Came Tumbling Down

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지음
금태섭 옮김, 궁리, 636쪽, 2만5000원

"배심원들은 평결에 합의했습니까?"

배심원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예, 재판장님."

판사가 묻는다. "평결 내용은 무엇입니까?"

"피고는 무죄입니다."

원고와 피고를 대표하는 검사와 변호사 양측의 불꽃 튀는 설전이 펼쳐진 뒤 12명의 배심원이 최종 판정을 내리는 배심원제도. 할리우드 법정드라마에서 익히 봐왔던 장면이다. 이 책은 미국사에 한 획을 그었던, 혹은 미국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던 여덟 가지 재판을 생중계한다. 사건 개요는 물론 검사와 변호사의 구두변론, 탁구공을 주고 받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대화, 판결문 등도 그대로 실어 당시 법정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마침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배심원제가 시범 운영되고 공판중심주의 논의가 뜨거운지라 남다른 느낌이다.

첫 사례는 스물한살때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식물인간이 된 카렌 앤 퀸란을 둘러싼 안락사 논쟁. 퀸란의 부모는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달라고 요청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병원 측에 퀸란 측 변호사는 단호히 맞선다. "전선과 튜브, 기계장치로 그럴 듯하게 보이기만 하면 죽음도 속일 수 있다는 착각에, 깨어날 가망도 없는 사람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퀸란의 승소 판결은 대중이 '죽을 권리'를 인식하는데 시금석이 됐다.

인기 라디오 DJ였다가 하루 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모든 것을 잃게 된 존 헨리 폴크. 마녀사냥을 거둬달라고 부르짖는 변호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공산주의"라는 호소가 절절하다. 배심원을 향한,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양복 소매에 도청장치를 숨긴 자경단원의 손에 맡기겠느냐"라는 질문도. 1980년대 벌어진 포르노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 재판은 행위의 도덕적 본질에 관계없이 변호사가 논리와 법리를 얼마나 요령껏 이끌어내느냐에 재판의 승패가 정해질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플린트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이자 저명한 목사인 제리 폴웰이 화장실에서 어머니와 성교하는 내용의 패러디 광고를 허슬러에 실은 뒤 고소당한다. 그러나 유능한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1조를 논거로 "공인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해 등 돌린 배심원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이밖에 19세기 흑인노예들의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과 노예제도, 93년 보험회사의 보험금 지급 거절로 인해 사망한 환자와 의료보험제도, 24년 버지니아주의 강제불임시술과 출산의 자유 등이 수록됐다. 미국 정치나 역사, 나아가 세계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눈을 반짝이고 봄직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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