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길없는 길 - 내 마음의 왕국(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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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최인호 이우범 화
나는 그 왕릉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러갔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무심코 왕릉을 돌아다니면서 도시락을 까먹고 사진을 찍고 하였지만 아아, 그 해 봄 4·19혁명이 일어났고, 진달래 피는 그 봄에 내 친구들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그 가슴에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들을 쏟으며 죽는 것을 보았던 나는 내가 원하던 대학에 입학한 즐거움도 잠깐, 그 왕릉에서 내 친구들처럼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를 쏟으며 죽고 싶었다.
내가 사진을 찍기 위해 올라가 타고 놀던 기린, 코끼리, 해태 등의 서수(석수)들은 고종황제의 무덤을 지키는 들짐승들이었으며, 그 무덤 속에 묻힌 사람이 바로 내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때 나는 들고 간 소주를 꺼내 마시면서 울었다.
한낮의 왕릉 속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놓고 울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인 고종황제의 찬 친전(친전)속에서 울었고, 왕릉 위에 소주를 따라 부으면서 울었다. 나는 그 무덤 속에 묻힌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가엾은 할아버지.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된 내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 묻힌 할아버지 고종보다 더 불쌍하였던 것은 왕릉 위에서 울고 있는 내 자신이었다.
나는 내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망해버린 왕조의 후예로서 왕국을 꿈꾸는 몽상가로서의 내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자랑스럽게 입학한 대학 시절 나는 보았다. 내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다 더 큰 자유가, 보다 더 큰 민주를 꿈꾸다 가슴에 총을 맞아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를 흘리면서 죽던 내 친구들. 그 친구는 아직 성한 몸으로 살아남은 내가 피를 뽑아 수혈하려 하자 이렇게 말하였다.
『나보다 더 어린 저 친구에게 피를 주게.』
머리를 깎은 고등학생에게 피를 양보하고 죽어가던 내 친구를 보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었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청춘인가. 이것이 내 왕국인가. 나는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독을 마시고 죽고 싶었다. 내 친구처럼. 입에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를 토하면서 죽고 싶었다.
나는 젊었으나 희망도 없었다.
한낮의 태양은 발광하듯 뜨거웠고, 내 할아버지, 내 큰아버지의 왕릉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홍살문까지 일렬로 세워진 문무석(문무석)의 석인(석인)들만 태양 빛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돌로 만든 신하들. 무덤 속에 묻힌 영혼들을 지키는 돌로 마든 신하들. 나는 내가 스무 살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청춘이 아니라 그 왕릉을 지키는 돌 사람들처럼 돌의 피와 돌의 심장을 지닌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곳에서 죽고 싶었다.
돌의 심장을 가진 돌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를 토하면서 죽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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