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 내 마음의 왕국(6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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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최인호 이우범 화
어머니는 그때 한이 맺힌 듯 울다가 길게 한숨을 쉬곤 하였다.
『그래 너를 데불고 동궁 앞에 갔었더니만 입구를 키던 사람이 가로막고 묻데. 으쩐 연유로 빈소에 들어가냐구 말이여. 그래 내가 말허였지. 그 분은 내 서방님이고, 이 아이는 그 분의 아드님이요. 그러나 난 문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였소. 그냥 쫒겨 나고 말았던 것이지. 그래서 별수 없이 자넨 사생아가 돼 뻔졌지요. 학교에 넣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내 성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으셨다.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울다 이야기하고 우라 이야기하고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내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고백을 들으면서 감정의 변화를 더디 가져오는 것일까. 나는 그저 멍한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져온 음식을 펼쳐 놓고 술을 따랐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올리듯 어머니는 두 손으로 술을 따르고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무덤 가에 뿌렸다. 어머니는 옆 리의 할머니 무덤에도 술잔을 올리고 술을 뿌렸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내게 술잔을 따라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내가 술을 따르고 절하자 어머니는 내게 말하였다.
『오늘부터 아드님이신 그대의 성은 이(이)씨로 되었으니 그런 줄 아시오. 아드님이신 그대의 이름도 내가 지은 것이_아니라 전하께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지어주신 이름이니까.』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내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내가 당황해 하였지만 어머니는 내 앞에 정중히 절을 올리고 나서 두 손으로 술을 따라주었다.
『저야 비록 기생의 신분인 천비(천비)이오나 아드님이신 그대는 왕세자의 세자마마이옵니다. 세자께오서는 황가의 피를 타고난 왕자마마올습니다.』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내게 두 손으로 받쳐 올리면서 어머니는 말하였다.
『전하, 제가 올리는 술 한잔을 받아 드십시오. 』
지금 정확히 기억되지는 않는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술을 따라 두 손으로 올리는 그 술잔을 내가 받아 마셨던가 어쨌던가 하는 기억은 불분명하다. 아마도 나는 그 술을 마셨을 것이다. 어머니와 자식간의 술잔이 아니라 마치 군신(군신)의 예의를 다하는 것 같은 그 술잔을 나는 마셨을 것이다. 차마 어머니의 그 진지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모른 채 할 수는 없었을터였으므로.
그때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마마, 왕조가 멸망하였다 하지만 아직 이 풀(초)도 마마의 것이옵고, 저 나무도, 저 강도 모두 다 아직 마마의 것입니다. 저 하늘도, 하늘에 뜬구름도, 저 숲 속을 노니는 사람들도, 모두 다 마마의 신민(신민)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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