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방일 열흘 앞두고 「일왕 사과」 새 불씨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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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직접 분명히 표명해야” 노대통령/“총리가 대신 청산발언” 일 의회·정부/정부,일측에 「사과진전」 강력 요구
【동경=방인철특파원】 노태우대통령이 방일을 앞두고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아키히토(명인)일왕의 분명한 사죄를 직접 촉구한 데 반해 일본정부나 의회는 이를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방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이 문제가 한일간의 새로운 불씨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노대통령의 사죄발언요구에 대해 일본정부나 자민당은 일왕을 통한 사죄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자 우리정부는 외교경로를 통해 일본정부가 노대통령의 뜻을 수용할 것을 계속 촉구하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관계기사3면>
노대통령은 14일 방일에 앞서 일본의 서울특파원단과 가진 회견에서 『과거의 역사에 관해 가해자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전제,『일본측이 천황의 이름에 구애되지 않고 솔직하게 생각한다면 과거문제가 어떻게 해결돼야 될지는 자명한 것』이라고 말해 일왕이 직접 분명한 사죄를 할 것을 촉구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지난 84년 전두환 당시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때 히로히토(유인) 전일왕이 표현한 「유감의 뜻」은 『사죄인지 아닌가가 확실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지적,『가해자가 사죄인가 아닌지 모르게 모호하게 이야기하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진심을 의심하게 되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일본 자민당은 새로운 아키히토국왕이 과거문제를 언급할 경우 전왕이 전전대통령에게 말한 이상의 사죄내용을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당론으로 결정,일본정부에 통고했으며 일본정부도 이같은 범위안에서 새 국왕이 사죄문제를 언급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일본 자민당의 오자와(소택) 간사장은 이 문제와 관련,핵심 당직자회의를 갖고 『국가의 이해가 걸린 정치의 이런저런 문제에 천황의 말을 빌리려 하는 것은 애초부터 옳은 일이 아니며,헌법의 취지에도 배치된다』고 말하고 『일왕이 역사청산문제에 보다 진전된 언급을 하게되면 헌법에 위배되므로 총리가 대신 청산발언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같은 자민당의 당론을 정부에 통보했음을 아울러 밝혔다.
사카모토(판본) 일본관방장관도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은 상징국왕제이고 헌법은 국왕의 국사행위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고 전제,『국왕의 공적행위에 의한 발언은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헌법의 입장에 비추어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해 아키히토국왕의 발언이 고 히로히토국왕의 발언범위내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했다.
노대통령은 일본특파원들과의 기자회견에서 『만일 일본이 도량을 갖고 확실하게 과거역사를 청산한다면 한국 뿐 아니라 중국등 아시아 각국이 일본을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아시아의 세기라는 21세기에 한일양국이 동반자관계로 협력해나가는 것은 극히 중요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아시아의 미래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정부는 노대통령의 방일시 일왕의 사죄발언 수준이 지난 84년 전두환 당시대통령 방일때의 「유감표명」 이상의 진전된 사과발언을 직접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이를 일본측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15일 가이후(해부)총리가 대신 사과하고 아키히토 일왕은 84년 수준의 유감표명에 그친다는 일본측의 사과방안은 국민감정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고 『정부는 「반성」등 보다 진일보한 사죄표명을 일왕이 직접 할 수 있도록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무부는 이와관련,이원경 주일대사에게 훈령을 내려 일본정부측에 정부의 이같은 입장을 거듭해서 강력히 전달했으며 지난 14일엔 김정기아주국장을 일본에 급파,일본정부측의 입장을 재타진하고 실무적 협의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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