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툰은 만화로 쓰는 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국내 한 컷 만화, 즉 카툰의 대표적인 작가인 사이로(63.청강문화산업대 교수)씨가 8년 만에 새 카툰집'사이로 여행기'(초록배 매직스.9천5백원)를 펴냈다.

낚시가 취미인 그의 작품에는 산과 강, 나무와 물고기 같은 자연이 즐겨 등장한다. 그러나 개발중심의 사회에서 자연과 교감하고픈 현대인의 꿈은 번번이 좌절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를 일찌감치 눈치 챈 작가는 자연과 충돌하는 인공의 사물을 등장시켜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한다.

예컨대 강태공의 낚싯대에 걸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생선통조림인데, 강태공 역시 미끼 대신 말굽자석을 준비한 모양새로 그려낸다. 한 폭의 한국화처럼 여백이 풍성한 그의 그림에는 각각 이처럼 적잖은 얘기가 담겨 있어 느린 호흡으로 살펴봐야 제 맛이 난다.

"극화만화가 소설이라면, 카툰은 만화로 쓰는 시(詩)예요. 내재하는 리듬을 실어야죠. 물론 자연을 그리기만 하면 풍경화죠. 거기에 흔히 '에스프리'라고 부르는 유머의 맛이 들어가야 카툰이 되죠."

한양대 법학과 재학 중 잡지의 신인공모로 데뷔해 이후 각종 신문과 잡지에 40년 가까이 카툰을 그려온 작가의 간결한 설명이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한 컷 만화에 글을 곁들인 형식이 새로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가 가려는 길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카툰은 한 컷 안에 모든 걸 담는 형식입니다. 짧은 설명글은 물론이고 제목도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한 편의 작품이죠. 당시의 사건을 모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시사만화와도 다릅니다. 시사만화가 주는 웃음이 박장대소라면 카툰은 갈수록 감흥이 오래 가는 웃음입니다."

그는 시인들이 여러 차례 퇴고를 거치는 것처럼, 평소 간결한 스케치를 모아두었다가 작품을 그리곤 한다고 소개했다. 펜촉의 끝을 잘라 굵기를 달리해 쓰는 것도 이 작가의 독특한 방식이다. 덕분에 그의 선 한 줄은 때로는 넉넉한 붓자국 같고, 때로는 날카로운 펜선 같은 다양한 맛을 내곤한다.

1970, 80년대만 해도 웬만한 잡지마다 한 두쪽 짜리 연재만화와 카툰이 실리곤 했지만 요즘은, 특히나 카툰은 발표지면을 찾기가 쉽지 않은 처지다.

그는 "극화만화가 종로 큰 길이라면, 카툰은 안쪽 골목인 피맛골"이라고 비유하면서 "일찍부터 변방의 오솔길을 택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필명'사이로(史二路)'는 직장인과 만화가, 극화만화와 카툰 등 각각 두 가지 길 가운데서 그가 한쪽을 선택해왔음을 집약해 표현한다. 작가는 "영어로는 목초 저장창고인 silo, 그래서 아이디어 저장창고라는 뜻도 있고, 우리말로는 사잇길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했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