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의 사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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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는 24일로 예정된 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재일동포의 법적지위문제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한일 두나라의 「불행했던 과거」청산문제를 놓고 일왕이 어느 수준으로 「사과」를 하는냐 하는 것이다.
사흘전만 하더라도 일본정부는 일왕이 노대통령과의 회담이나 만찬석상에서 「유감의 뜻」을 표명하되 그 내용은 84년 전두환 전대통령의 방일때 히로히토(유인)전왕이 했던 발언보다 더 구체적인 사과의 뜻을 포함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가이후(해부준수)일본총리는 9일 중의원의 한 위원회에 참석,『왕을 외교문제에 개입시키는 것보다 총리가 일본국민을 대표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고 밝혀 일왕의 사과발언은 종전과 같이 명확히 하지 않는채 또다시 어물쩍 넘어갈 모양이다.
국제법상 국가간의 책임을 추궁하는 방법으로는 원상회복·손해배상·진사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진사의 표현방식으로 흔히 쓰이는게 「유감」(regret)이라는 용어다. 물론 외교적으로 좀더 강한 사죄의 뜻을 담을 때는 「사과」(apologize),또는 「후회」(repent)등의 용어도 쓴다.
따라서 일제 36년간의 피해자를 대표하는 한국의 대통령에게 가해자측의 상징으로 알려진 일왕의 사과발언이 「유감」이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색하기 그지 없다.
서독총리였던 브란트는 70년 폴란드를 방문했을때 나치의 폴란드인 학살현장에 찾아가 헌화를 하고 30초동안 무릎을 꿇었으며 귀국한 다음에는 『독일인의 이름을 남용하여 저질러진 백만배의 범죄에 대해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고 술회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역사에 대해 얼마나 겸허한 자세인가.
그러나 일본은 과거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보다 패전에 대한 원통함만 강조하고 있는 인상이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광도)에 평화공원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라. 그들은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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