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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0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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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남로당기관지 창간 서둘러/해방일보 편집국원중심 주팔아 자금염출
허헌은 미국을 상당히 평가하고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죄익이라고 하면 전부 반미ㆍ친소로 알지만 그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는 조선내 좌익세력과 미국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남로당원이 소련유학을 가는 것도 좋으나 미국으로 유학갈 필요도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딸 허정숙을 데리고 세계일주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일부러 하와이에 들러 이승만박사를 방문했다. 해방이후 이박사와의 타협을 겨냥한 사전포석이었다.
45년9월6일 인민공화국 수립당시 이박사를 주석으로 추대하는 데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해방후 처음 수립되는 정권은 어떤 정파의 단독정권이 아니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연립정권이라야 한다고 생각해 국내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미국ㆍ중국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이박사가 주석직을 거부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심장이 약했는지 항상 숨이 가쁜 모습이었다. 또 건강이 나빠 얼굴빛도 좋지 못했다.
그는 전쟁의 불길속에서 51년8월14일 청천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의 딸 허정숙이 1주일이나 가서 시체를 찾으려 했으나 끝내 못찾고 눈이 부은채로 평양에 돌아왔을때 나도 슬퍼서 눈물이 저절로 났다.
사람의 인연은 알 수 없는 것인지 허헌의 신임을 받은 내가 뜻밖에 평양에서 그의 딸 허정숙밑에서 일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허헌ㆍ허정숙부녀는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사무국장 박문규는 경북 경산사람으로 경성제대 제1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대학 연구실에 조교로 남아 조선 농업경제를 연구했다.
해방전에는 대학 연구실에 있으면서 동창생 이강국과 최용달(보성전문학교 교수) 등과 만나며 그들을 측면으로 도와 주었지만 직접 공산주의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말이 적으며 아주 근검한 사람이었다. 정해진 시간에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일이 있든 없든 반드시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나와 둘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한 친밀한 관계로 대구 10월사건후 민전에서 조사단을 편성 파견할때 나더러 사무국장이 되어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창간의 자금은 결국 우리 해방일보 편집국원들이 각 도를 맡아 직접 주를 팔아 자금을 모았다.
내가 맡은 곳은 대구와 경북이었다. 그 때 남로당 당세를 볼때 서울시와 경북도가 가장 강했다.
서울시와 경북에서 자금의 반을 모으고 반은 다른 각도에서 모으기로 했다. 나는 경남출신인데 무슨 출장만 있으면 어쩐지 경북을 맡게 되었다.
대구역에 도착하니 경북도당 선전부장 황보가 마중나와 있었다. 그가 안내하는 데로 따라가보니 굉장한 큰 기와집이 있었다.
서울에도 그만한 기와집은 드물 정도였다. 밤이 되니 도당위원장 이상훈이 찾아와 셋이서 회의를 시작했다.
서울의 정세를 이야기하며 나는 『당기관지는 정확한 당의 노선은 물론,당원들이 경찰에 쫓겨 숨어 있을 때도 당이 가는 방향을 알게 해주며 다시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도 지방당 조직들은 하루 한끼 밥을 절약해서라도 당기관지 창간 기금을 모아주기 바란다. 그저 기부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주를 사달라.
「노력인민」의 소유자는 당중앙이 아니고 주를 사준 당원 각자 대중의 것이다』며 내가 서울에서 위임받아 온 전체 자본금 25%의 배인 50%를 할당했다.
내 생각으로는 경기ㆍ강원ㆍ충청ㆍ전라도는 할당량을 도저히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면 「노력인민」은 결국 창간못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꼭 「노력인민」을 창간하고 싶어 선전부장을 저녁마다 불러 독촉했다. 황보선전부장은 나의 성화같은 독촉에 잘 협력해 주었다.PN JAD
PD 19900509
PG 05
PQ 03
CP HS
CK 03
CS H05
BL 1643
GI 박준영
TI 뉴욕에 「황ㆍ백­흑」인종차별 파문 확산
TX ◎백인언론인 욕설에 소수민족 발끈/흑인과도 감정 대립… 법정 싸움도/사태 악화되자 지사ㆍ시장까지 중재에 나서
미국 뉴욕시에서 한국인이 관련된 황흑백인종분규가 찬반양론 속에 파문이 확대되고 있다.
뉴욕 뉴스데이지의 퓰리처상수상 칼럼니스트 지미 브레슬린씨가 지난 4일 동료 한국계 여기자 여지연씨(25)에게 폭언한 것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소수민족단체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가 하면 지난 1월 뉴욕시의 한국인 식품가게에 물건을 사러갔던 아이티계 흑인여성이 가게 한국인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제소,4개월째 폭행 사실여부와 함께 한국ㆍ흑인 사회간의 인종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미 언론은 물론 쿠오모 뉴욕주지사와 딘킨스 뉴욕시장까지 개입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뉴스데이지의 여지연씨 사건은 여씨가 브레슬린이 쓴 기사를 비판한데 대해 브레슬린이 여씨에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노란 망나니」라는 욕설을 퍼붓고 이어 『신발이나 팔아라』고 폭언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폭언이후 뉴스데이지 소속 소수민족계 기자들이 브레슬린씨에게 사과를 요구한데 이어 아시아계 미국인언론협회가 『이번 폭언은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라고 비난,신문사측에 브레슬린씨의 직위정지를 요구했다.
또 뉴욕주 의회도 도브 하킨드의원 등 주의원 6명도 7일 브레슬린의 직위정지를 요구하는 전문을 뉴스데이지 편집진에게 보냈다.
이에 앞서 6일에는 아시아계 미국언론인협회와 일부 소수민족 인권단체가 뉴욕맨해턴에 있는 유니언 스퀘어 파크에서 항의모임을 갖고 브레슬린씨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더욱이 뉴욕 흑인언론인협회도 브레슬린씨의 직위정지를 요구하는 서신을 신문사측에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브레슬린씨가 이미 정중하게 사과했다』고 전제,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카치 전 뉴욕시장은 브레슬린시의 폭언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고 『만약 그가 흑인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면 해고했을 것』이라며 이번 여지연씨 사건이 언어폭행 이상으로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라고 이론을 제기했다.
한편 뉴욕시 브루클린의 한국계 장병재씨가 운영하는 식품가게 레드 애플에서 바나나와 고추를 사러갔던 흑인여성 지젤렌 메티세인트씨가 한국인 종업원에게 폭행을 당해 앰뷸런스로 병원으로 옮겨진 일이 발생한 이후 4개월 동안 흑인인권단체가 반한국인 시위를 주도,한국인ㆍ흑인간에 미묘한 감정대립이 전개되고 있다.
이 지역 시민단체인 「경제적 권한을 위한 플레트부시연맹」 등 2개 단체는 레드 애플 등 2개 한국인 식품가게 앞에서 계속 피킷시위를 벌이며 한국인 가게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인종범죄 전력이 있는 흑인인권운동가 소니 카슨씨는 이 사건을 인종문제로 몰아가고 있어 사태는 점차 악화되고 있다.
뉴욕시 흑인들은 흑인거주지역의 한국인 가게주인들을 「흡혈귀」라고 비난하면서 『한국인들은 흑인거주지역에서 영업을 하며 흑인을 고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흑인사회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있다』고 다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딘킨스 뉴욕시장이 중재에 나서고 있으나 이미 인종문제로 확산된 이번 사건은 해결이 어려운 상태다.
특히 뉴욕주대법원이 이번 사건과 관련,흑인단체들의 시위금지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시민단체 변호사들이 법원의 명령취소신청을 내는 등 법정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뉴욕=박준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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