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분들만 못느끼는 위기/김두겸(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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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앙일보의 인기연재물 「중남미­영광과 좌절」을 읽다보면 우리나라가 어쩌면 그렇게도 중남미를 점점 꼭 빼어 닮아가고 있나 하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무엇보다 정부의 신용도가 땅에 떨어져 아무도 정부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부동산투기는 정권을 걸고라도 뿌리 뽑고 증권시장은 무제한의 특별 융자를 통해 육성시키겠다」던 정부말을 믿고 논 팔고 소 판 돈으로 주식을 산 사람은 불과 1년만에 폭삭 망했다.
땅에 떨어진 중남미 각국정부의 신용도도 큰 차이가 없다.
중남미에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새 지도층은 백척간두에 선 국가경제를 재건한다는 이름아래 제법 그럴싸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곧잘 발표하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뿐 계획을 수행할 능력도 재력도 있을 턱이없다
선거때만 되면 후보마다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맨먼저 고위 공직자의 비리를 뿌리뽑겠다고 공약하지만 당선만 되면 그만이다. 한때 일부 나라에선 떼강도를 막기위해 경찰관을 배로 늘리겠다는 정부발표가 있으면 시민들은 오히려 강도ㆍ절도예방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경찰관이 바로 떼강도로 변하는 수가 있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일보다는 놀기를 더 즐기는 경향도 비슷하다. 중남미만큼 놀기좋아하는 나라도 드물다. 주휴2일제는 보통이고 축제일이 많기로 유명한데다 여름휴가 또한 장기간이다. 다소 낡은 통계이지만 아르헨티나에선 근속20년이 넘는 샐러리맨의 여름휴가 일수는 35일,5년 미만의 근로자도 14일이나 된다.
우리는 지금 자정넘게 영업하는 술집없애기 운동을 경찰력까지 동원해 벌이고 있지만 놀기 좋아하는 중남미인들은 특히 야행성기질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웬만한 술집은 밤12시가 되어야 문을 열고 오전2시가 피크타임이다.
놀기좋아하는 민족 얘기를 하다보면 말기의 로마인이 연상된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의 흥망」에 따르면 당시의 연간 휴무일수는 반년인 1백75일,주말은 2∼3일이었다.
국민이 놀기를 좋아하면 정부도 여기에 부응해 줘야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
영특한 로마황제로 이름난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도 장기간에 걸친 검투경기를 벌여 인기에 영합했고 어리석은 콤모두스는 직접 검투사로 나서 투창으로 사자를 1백마리나 죽이고 납칼을 들린 노예와 검투해 관중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물가는 폭등하고 외채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도 브라질에선 지금도 카니벌이란 이름의 거국적인 삼바춤 놀이가 1주일이나 계속된다.
부동산투기 열병마저 번져 일할 의욕을 더욱 잃고 있는 국민을 달래기 위해선지는 몰라도 우리의 지도자들도 추석연휴ㆍ연초연휴ㆍ설날 3일 연휴등 노는날만 잔뜩 늘렸다.
말기의 로마인들은 육체를 움직이는 직업을 싫어하고 집안에 앉아서 하는 일만 찾는데 혈안이었다. 그러나 앉아서하는 일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 많지 않다. 자연히 실업자는 늘고 그 실업자들은 더 많은 복지를 요구,그 악순환끝에 로마는 망해갔다.
중남미도 그렇지만 우리도 지금 땀흘려 일하는 직업을 꺼리는 풍조가 번지고 있다. 고급인력은 남아돌고 기능공은 모자라서 난리다. 대학생들이 가장 희망하는 직업도 증권ㆍ보험ㆍ건설업ㆍ변호사등이다. 땀흘리며 서서 일하는 제조업이나 광업등은 인기가 없다.
이공계출신마저 연구소나 컨설턴트 지망생이 압도적이다.
멕시코ㆍ콜롬비아등 중남미제국의 권력구조는 대통령 단임제가 특색이다. 이는 장기집권과 1인독재화를 막는데 효과를 발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대신 친ㆍ인척비리,정경유착등의부작용도 결코 만만치 않다. 대통령이 임기를 끝낼때마다 장ㆍ차관,국영업체사장은 물론 말단공무원까지 상당수가 바뀐다.
공직채용에서는 능력보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이 평가되어 요직에 앉는자는 한결같이 대통령의 친ㆍ인척이거나 친척의 친척,아니면 친구의 친구들이다. 이들 공직자들은 퇴임후의 보신에만 몰두,국사는 별로 안중에도 없다. 이들의 중요과제는 재임기간중 평생 먹을 재산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니 정책의 일관성이란 기대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임기만 꼭 채우고 물러났다」고 5공정부는 내세우지만 임기만 채우고 반드시 물러나는 이들 나라의 풍토는 신기할 정도다.
한때 우리는 한국이 제2의 중남미가 되지 않을까 하고 온 국민이 우려했다.
그러나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정부사람들은 우리는 중남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갖가지 자료를 다 내보이며 반박했다.
지금도 그런 주장에 변함이 없는지 묻고 싶어진다.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하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주가가 폭락한다. 정부ㆍ여당이 물가대책이나 부동산억제책을 내놓으면 땅값은 더오르고 설렁탕값마저 그 발표를 비웃는 세상이 돼버렸다. 정치ㆍ경제ㆍ사회 구석구석에 병이 스며들고 있는데도 거여와 정부만이 위기의식을 못느끼고 믿어달라고만 되풀이한다.
이젠 우리 모두가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할 때가 된것 같다. 특히 지도자는 구름위에 있으면서 「보통사람」임을 자처할 것이 아니라 구름밑으로 내려와 국민과 함께 위기를 같이 느끼고 타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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