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촌' 여성에서 대학 우등생 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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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밤 안마시술소들이 즐비한 서울 장안동 일대. 집창촌은 줄어든 반면 안마시술소, 남성 휴게텔 등 유사 성행위 업소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최승식 기자

"4.5점 만점에 4.30을 받았어요."

21일 서울의 한 탈성매매여성 자활센터에서 만난 김지수(26.가명)씨는 대학에서 처음 받은 학점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는 2004년 말까지만 해도 서울 하월곡동 속칭 미아리텍사스촌에서 성매매를 했다. 김씨가 성매매를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카드 빚이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집안이 어려워진 뒤 남동생의 대학등록금을 대주고 자신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신용카드를 마구 쓴 것이 화근이었다. 낮엔 직장에 나가고 밤엔 룸살롱에서 일했지만 2년 새 1300만원으로 불어난 카드 빚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미아리로 갔다. 무섭긴 했지만 업주가 월 45만원씩 카드 빚을 갚아준다는 말에 선뜻 일을 하겠다고 했다. 하루 12시간씩 평균 10명 정도의 손님을 받았다. 손님이 내는 화대는 5만~7만원. 이 중 김씨 손에 들어오는 돈은 1만원이었다. 그나마도 주인은 계를 부어 목돈을 주겠다며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오히려 콘돔비.화장품값.옷값 등으로 빚만 쌓여 갔다. 임신중절과 성병은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혔다. 그 와중에 몸이 아파 하루를 쉬면 50만원의 빚이 쌓였다. "처음엔 내 발로 찾아갔지만 내 뜻대로 탈출할 수도 없더라고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2004년 10월. 그는 100여 알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호스트바를 들락거리느라 빚은 3000여만원으로 불어났는데 살길이 막막했다.

"업주들은 법이 시행되면 다 쫓겨난다고 마구 겁을 줬어요. 벼랑 끝에 서있는데 누가 뒤에서 탁 쳐서 밀어내는 느낌이었지요."

성매매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선불로 받은 돈 걱정이 앞섰다. 정부에서 피해여성의 자활을 지원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법을 제대로 알려주기만 했어도…"라며 말끝을 흐렸다.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쉼터를 소개받은 것은 자살 소동이 있고 난 뒤다. 아는 언니의 소개로 쉼터를 찾은 김씨는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텔레마케팅 교육도 받고 매일 어학원을 다니며 하루 10시간씩 공부에 매달렸다. "처음엔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도 어려웠고 다들 마음이 불안해 갈등도 많았지요."그는 쉼터를 몇 번 들락거리기도 했다.

주경야독 끝에 대학에 입학한 그에게 여러 자선의 손길은 삶의 의지를 북돋워 줬다. 그는 "가능하면 외국으로 유학도 가고 언젠가는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고 성매매 여성을 돕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성매매 여성에게도 내일이 있고 그들을 도와주는 손길이 많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문경란 기자<moonk21@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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