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놀음(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요즘 민자당은 무슨 영문인지 자꾸 모로만 간다. 앞으로 가도 시원치 않은데 이렇게 옆으로만 가면 언제 여당구실 한번 제대로 해볼지 모르겠다. 여소야대 시절은 「여소」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더니 지금은 「대여」도 아니고 「거여」가 돼도 무엇하나 풀리는 일이 없다.
대권 밀약설도 그렇다. 진부는 나중 일이고,왜 그런 말이 나오느냐 말이다. 말 잘하는 정치인들이 꾸어다 댈 핑계는 많겠지만 우선 밀실정치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거여」는 쥐도 새도 모르게 기습작전하듯 그것도 일요일에 일방적인 발표로 생겨났다. 그 무렵 국민들 사이엔 여소야대로는 곤란하구나 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치가 무르익으려면 그런 여론을 성숙시켜 요리를 할줄 알아야 한다. 그런 것 마다하고 쉬쉬하면서 서둔 결과는 오늘 국민들이 보는 그대로다.
그때 정치인들이 한 말이 있다. 백일하에 벌여놓고 정치협상을 하면 될 것도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 얼굴에 침뱉는 얘기다. 원칙과 신념이 있으면 될 일이 안될 턱이 없다. 지금 그 밀실정치의 산물인 대권 밀약설을 잠재울 논리는 뭐가 있는가.
오늘의 우리나라 정치상황은 정치부재를 넘어 통치력 부재상태다. 이 나라엔 상하도,앞뒤도,좌우도 없어 보인다.무엇하나 반듯하게 되는 일이 없는 것만 봐도 짐작되는 일이다.
지난 80년대초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자 한쪽에선 배우출신이라고 입을 삐쭉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배우」대통령도 투철한 정치철학과 통치 원칙,그리고 확고한 소신은 갖고 있었다. 그는 중산층의 소득세 탕감으로 잠자던 경제를 흔들어 깨웠고,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 큰소리 치지 않고도 큰소리 쳤던 카터보다 나은 정치를 했다. 한국과 필리핀의 「피플스 파워」를 말없이 격려해준 것도 레이건이었다.
우리는 지금 민주정부를 세운 지 3년이 다 되었다. 내년부터는 벌써 정권 후반기에 접어든다.
그때의 정치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는 보장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온 나라가 경제문제 하나만 가지고 씨름을 해도 제대로 될까 말까한데 정치인들은 한가하게 대권놀음이나 하고 있다. 이 답답한 세상,신록이 무색한 나날이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