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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사법수장의 화법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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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1일 오후 이용훈 대법원장이 퇴근하기 위해 대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김형수 기자

이용훈(64) 대법원장이 검사와 변호사를 싸잡아 비판한 속내는 뭘까.

법원 내부에선 이 대법원장이 평소의 소신을 밝히는 과정에서 나온 '즉흥적' 발언이라 보고 있다. 재경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 대법원장이 검찰의 수사관행과 재판제도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취임 이후 강조해 온 '사법개혁'이라는 화두를 다시 꺼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법조비리와 관련해 현직 고법 부장판사가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지자 검찰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작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장발부 기준을 강화하라"는 이 대법원장의 주문은 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된 7월 이후 부쩍 늘었다.

이 대법원장은 21일 평소처럼 오전 9시 출근해 하루 종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관 회의)를 주재했다. 법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건을 논의하는 전원합의체는 한 달에 1~2번씩 목요일에 열리며, 이날 회의는 예정된 것이었다.

이 대법원장은 1968년 대전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 2000년 대법관직을 마치고 변호사 활동을 하다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 할 말 하는 '벙커'=90년대 초 서울고법에서 이 대법원장과 함께 근무한 한 판사는 "이 대법원장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할 말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깐깐한 성격 때문에 배석 판사들 사이에서는 '벙커'(함께 일하기 힘든 상관을 빗댄 법원 내 은어)로 불리기도 했다.

이 대법원장은 85년 고법 부장판사 승진 전까지 잦은 인사이동을 겪으며 상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유신 초기인 72년 의정부지원 판사 시절 시국사건 피고인에게 징역 2년 이상 선고하라는 정권의 주문을 어기고 징역 6월을 선고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탓에 6공 때까지도 주요 보직에서 배제됐다. 이런 경력은 김영삼 정부 들어 '약'이 됐다. 93년 서울 서부지원장으로 승진했고, 법원행정처 차장을 거쳐 이듬해 대법관에 임명됐다.

◆ 대통령 탄핵사건 변호인=대법관 퇴임 뒤 이 대법원장은 400여 건의 사건을 수임해 60억여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 중에는 노무현 태통령 탄핵심판 사건도 포함됐다. 그는 대법원장에 지명된 직후 '코드 인사' 논란이 일자 "노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은 전혀 없고 변호사로서 역사적인 사건의 수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한나라당과 시민단체가 제기한 대통령선거 당선무효 소송 2건에서도 노 대통령의 변호를 맡았다.

2004년 대법원에서 열린 공개변론에서 그는 "(검찰이 작성한)피의자 신문조서가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피의자가 법정에서 '내가 진술한 대로 기재됐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검사실에서 조성된 조서는 밀실에서 조성됐다' '검찰이 작성한 수사기록을 던져버려라'는 등의 최근 발언도 이 연장선상인 것으로 풀이된다.

◆ 직설적 화법이 화근=이 대법원장은 취임 직후 '사법개혁' '국민재판론' 등 관심을 끄는 발언을 쏟아냈다. 올 2월엔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 1심 재판을 비판하며 "사법부가 국민 신뢰를 회복하려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엄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재판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혀 판사의 재판권을 침해했다는 논란을 빚기도 했다.

대법원의 한 판사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말하는 화법 때문에 이번 일이 불거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25일 취임 1주년을 맞아 관훈클럽 토론회를 할 예정이다. 대법원 실무자들은 대법원장이 관훈클럽 토론회를 한 전례가 없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 의견을 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다.

김형성(성균관대 법대) 교수는 "전체적인 맥락이 사법개혁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 것일지라도 사법부 수장으로서 표현과 접근 방식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병주 기자 <byungjoo@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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