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인계철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위무자에게는 조희라는 젊은 애첩이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첩을 순장(殉葬)하던 시절이다. 조희를 예뻐한 위무자는 아들 위과에게 버릇처럼 말했다. "내가 죽으면 조희를 순장하지 말고 개가(改嫁)시켜라."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혼미해진 위무자는 같이 묻어 달라고 번복했다. 위과는 "맑은 정신으로 한 치명(治命)을 따라야지 정신이 어지러운 때 한 난명(亂命)을 따르면 안 된다"며 조희를 개가시켰다.

그 뒤 전쟁에 나간 위과가 진(秦)의 장수 두회에게 쫓길 때였다. 갑자기 두회의 말이 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위과가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위과의 꿈에 조희의 아버지 혼백이 나타나 "풀을 묶어 딸을 살려준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말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고사다.

요즘으로 치면 그 풀은 일종의 부비트랩(booby trap)이다. 인계철선(trip wire)을 건드리면 수류탄이나 지뢰가 터지기도 하고, 죽창 함정에 빠지기도 하는 무기다. 고약한 것은 적뿐 아니라 아군, 무고한 민간인까지 희생시킨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인계철선에는 '파괴' 외에 '경보' 기능도 있다. 게오르규의 '잠수함 속 토끼'가 그런 역할을 한다. 산소에 민감한 토끼가 잠수함 속 산소 부족을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이 키운 병아리도 비슷하다. 독가스에 약한 병아리가 비실댈 때 바로 방독면을 쓰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300만 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묻혀 있는 휴전선에 또 하나의 인계철선 역할을 해온 것이 미군이다. 북한의 남침로에 배치돼 전쟁이 나면 자동 개입하게 되는 경보장치다. 그러나 미2사단이 한강 이남으로 옮기면서 그 역할은 끝이 났다. 그렇다고 미군이 완전히 빠진 건 아니다. 평택.오산의 미군기지는 북한 노동미사일의 첫 번째 목표다.

이때 인계철선이란 표현은 미군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미국인에게 기분 좋은 말이 아니다. 그래서 미 국방부는 그런 표현을 쓰지 말라고 부탁까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의회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보수파가 "미 2사단을 인계철선으로 이용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진정한 친구는 그러면 안 된다는 훈계도 했단다. 한반도 안보에는 한.미 양국의 이익이 걸려 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도 자기 국민을 희생물로 이용한다는 말은 고약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