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감독이 시나리오도 씁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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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나의 직업인 영화 만들기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최초의 발상, 시나리오 작업, 배우 캐스팅과 장소 헌팅, 콘티 작업(장면 설계), 촬영, 편집, 사운드 믹싱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이 모든 단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통과해야만 자신의 작품 하나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단계마다 서로 다른 즐거움과 고통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힘든 단계를 굳이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시나리오를 꼽겠다.

특히 나는 이 과정에서 정신이상(?) 증세를 자주 노출한다. 작업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스스로 화들짝 놀란다거나, 시나리오 속 감정에 휘말려 운전 중에 혼자 마구 운다든가… 등등. 핸들을 쥔 채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내 모습은 옆 차 운전자가 보기에 무척이나 꼴사납고 황당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이상증세들은 홀로 고립된 채 작업할 때 발생하는 것 같아, 공동작가를 옆에 앉혀놓고 이러쿵저러쿵 상의도 하고 아이디어를 나눠보기도 하지만 고민 속에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독한 최후의 순간은 피할 수 없다. 촬영할 때는 수십명의 스태프.배우들과 뒤엉켜 촬영지를 누비고, 편집할 때는 편집기사와, 녹음할 때는 믹싱기사와 아기자기한 파트너십을 펼치지만 시나리오 쓰기만큼은 자기 자신을 마주한 채 외로운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작가나 감독은 이 외로운 싸움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다들 나름대로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이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퀴퀴한 여관방에 들어가 햇빛을 멀리한 채 단숨에 써내려가는 사람, 깊은 산속의 암자나 바닷가 민박집에 들어가 세상을 등진 채 유유자적 작업하는 사람, 옛날 고시생 스타일로 도서관에 출퇴근하며 작업하는 사람 등등.

나의 경우 데뷔작 시나리오를 쓸 당시, 지나치게 적막한 장소보다는 약간은 어수선한 곳에서 오히려 더 집중이 잘 되고 아이디어도 솟구쳤다. 그래서인지 공책이나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여기저기 떠돌 듯이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커피숍 한 구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오후내내 작업하다 주인의 눈치가 보이면 슬그머니 커피 한잔을 더 시키면서 버틴 적도 있고, 널찍한 관공서 로비의 소파에 앉아 오가는 민원인들을 바라보며 작업한 적도 있으며, 비오는 날 한강 둔치에 차를 세워놓고 빗물 흘러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예술 한번 해보겠다고 갖은 육갑을 다 떨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반면 두번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영화사에서 마련해준 깔끔한 오피스텔에서 출퇴근하며 비교적 공무원 분위기로 작업했던 것 같다. 물론 시나리오가 안 풀릴 때 그 오피스텔 방 안에서 데굴데굴 몸부림치며 선보였던 나홀로 엽기행각(?)들을 돌이켜 보면 전혀 공무원답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세번째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둘러싼 이런저런 상황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나가면서, (이렇게 일간지에 글쓰는 것과 같은 주제넘은 일도 끝을 맺으면서 ) 시나리오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나 자신을 몰고 간다. 마치 눈앞에 펼쳐진 가시밭길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신발.양말 다 벗고 맨발로 걸어들어가는 심정이다. 발에선 피가 줄줄 나겠지만, 그래도 지나가야 한다. 시나리오는 작가에게 맡기고 연출만 해보면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스타일이 못 된다. 그저 이 과정이 끝나면 보고 싶던 스태프들, 사랑하는 배우들과 다시 만나 신나게 촬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나로 버티면서, 한줄 한줄 즐겁게 써나가는 것이다.

봉준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