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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6·3 세대여, 역사를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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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러나 대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60년 4.19로 민주주의가 어렵게 꽃을 피웠는데 박정희가 짓밟았다고 그들은 믿었다. 박 소장이 민선 대통령이 됐지만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군사정권이었다. 야당 지도자 윤보선씨는 부정선거라며 "정신적 대통령은 나"라고 주장했다.

대학생들은 야당과 연합해 대규모 반(反)박정희 저항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 비밀스러운 한.일 회담이 나타난 것이다. 64년 봄 학생들은 "굴욕적 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시위가 커지면서 구호는 "정권 퇴진"으로 바뀌었다. 6월 3일 시위대는 파출소를 불태우며 청와대 근처까지 전진했다. 박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 55일 동안 대학생.시민 300여 명이 구속됐다. 이것이 6.3 사태다.

6.3은 반박정희 운동의 1세대였다. 이들의 후배는 이후 3선개헌 반대, 민청학련(유신 반대), 긴급조치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6.3 세대는 지금 6.3 동지회에 속해 있다. 회원은 300여 명이며 회장은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다.

시위의 함성이 사라진 지 42년이 지난 지금 6.3 세대가 역사 앞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재오 의원 등 의원 30여 명이 제출한 민주화운동 보상법 개정안이 국회 행자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개정안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부터로 돼 있는 보상 대상자를 '64년 6.3 세대'로 앞당겼다. 이 의원은 개정안을 내면서 "6.3 학생운동은 국민의 정서를 외면하고 굴욕적 한.일 회담을 강행하던 비민주적인 군사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는 대규모의 데모를 벌임으로써 그 후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체제 반대운동 및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도록 하여…"라고 적었다. 6.3 세대의 이런 요구는 옳은 것인가.

한.일 회담은 정책을 놓고 집권자와 반대자가 극명하게 맞붙은 대표적 사례다. 식민지배 36년의 증오와 한(恨)이 여전했지만 집권자는 경제개발자금이라는 실리를 택했다. 대부분 대학생인 반대그룹은 실리보다 역사의 분노 쪽으로 질주했다.

계엄의 진통 끝에 결국 65년 한.일협정은 타결됐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도합 8억 달러가 흘러들어 왔다. 일제 36년 선열들이 흘린 피와 눈물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 돈은 고스란히 경제개발에 들어갔다.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소양강댐을 지었고 농업용수를 개발했다. 한.일 회담에서 청구권분과 대표를 맡았던 김정렴씨는 훗날 9년3개월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청구권 자금 8억 달러가 없었다면 제철이나 고속도로.댐 건설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Q씨는 64년 계엄 3개월 동안 시위 배후조종자로 수배됐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3선개헌은 집권자의 장기 집권 시도였지만 한.일 회담은 특정 시기 특정 정권의 특정 외교정책이었다"고 지적한다. 정책에 반대해 투쟁한 것을 국가가 보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6.3 동지회원 대부분은 정치인.기업인.교수 등 사회지도그룹에 속한다. 젊은 시절 그들은 한.일 회담 반대가 애국이라 믿으며 거리로 나섰다. 강물의 반대편에서 박정희는 거꾸로 한.일 회담이 애국이라 믿었다. 누가 옳았는가. 그것은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가 심판할 일이 아니다. 6.3 세대가 의연하려면 역사에 맡겨야 한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