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고싶은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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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학1학년 학기말 한문 시험 때의 일이다. 문제지를 받고보니 해석을 요구한 문장의 하나가 교과서 밖에서 출제되었다. 그 시작이 『왕옥경장팔촌 무자 폐지운운…』으로 되어 있었는데 「옥경」이라는 말은 대충 짐작이 가나 「폐지」라는 말과의 문맥이 닿지 않아 고심끝에 『왕은 옥경(생식기)의 길이가 팔촌이나 되지만 자식이 없으므로 그것을 거세 했다』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짐에 돌아온 나는 그 원문을 찾기 위해 원전의 이곳 저곳을 뒤지게 되었는데 그만 내용에 심취하여 번역본 『삼국유사』한권을 통독하게 되어버렸다.
이때의 신선한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우선 그 내용이 재미있었다. 마치 뼈대만을 간추린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종횡무진으로 엮어져있었다.
다음으로 나는 고대 우리 선조들의 상상력에 또한번 감탄하였다. 거기에는 언뜻 믿어지지 않는 기상천외한 사건과 모험담이 기술되어있었다.
그것은 그 무렵 내가 즐겨 읽던 그리스신화나 플루타크영웅전이나 성서의 내용을 종합한것 같았지만 여기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 친숙하고 소박하고 그러면서도 한편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호소해오는 어떤 육성같은 것이있었다.
거짓 같으면서도 진실이고 환상인것 같으면서도 현실인, 돌아가신 아버지의 녹음된 육성같은것 말이다.
참으로 거기에는 우리민족의 삶과 꿈, 시와 사랑, 통찰과 예지가 살아숨쉬고 있었다. 어떻든 원문 (『삼국유사』소재 「찬기파랑가」)을 찾아 해독해보니 「폐지」라는 말은 「거세했다」가 아니고 「왕비를 폐하였다」는 뜻이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던 것을 고백한다.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다. 그 중에는 전공서적도 있고 교양서적도 있으며 필독서도 있고 실용서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한권의 책 읽기를 권할 기회가 있다면, 그리고 그가 한국인이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먼저 『삼국유사』를 읽도록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전공자에게는 전공서가, 일반인에게는 필독해야 할 교양서가 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한국인의세계관·역사관·인생관·,도덕관·예술관이 함축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책을 읽지 아니하고 우리의 역사·우리의 문학·우리의 종교·우리의 도덕·우리의 정치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세영 (서울대 인문대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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