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참사 있었다 … 보험금 달라" 북한, 영국·러시아 재보험사에 이례적 요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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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거액의 보험금을 받기 위해 국제보험사에 여객선 침몰과 열차 사고 등 대형 참사 내역을 상세히 공개한 사실이 확인됐다. 19일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조선민족보험총회사는 4월 원산~흥남 간 여객선 침몰 사고와 비슷한 시기에 함경도에서 발생한 두 건의 열차 사고, 민간헬기 추락 사고 등 모두 네 건의 대형 사고에 대해 최근 영국.러시아의 재보험사에 보험금 지급을 요청했다.

이들 재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에 앞서 손해사정을 위한 현장실사를 요청했으며, 북측이 이를 수용해 보험사 관계자가 입국비자를 받아 사고 현장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은 "참상 입증을 위해 사고 사진과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된 현장을 공개하는 등 북한 당국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군인.민간인 등 수백 명이 사망한 함경남도 고원군 열차충돌 사고와 암초에 충돌해 승객 200여 명 중 100명 이상이 사망한 여객선 침몰 사고에 대한 보상금은 수백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2건의 사고에서도 각각 비슷한 액수의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북한이 대형 참사 내역을 서방에 상세히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지난해 9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계좌 동결로 시작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로 최악의 궁지에 몰리고 있다"며 "지난 여름 북한을 휩쓴 수해와 관련해서도 보험금 요청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신은진.손해용 기자

[뉴스 분석] 보험금은 금융제재 대상 안 돼
미국의 돈줄 압박에 고육지책

북한이 서방 보험사에 대형 참사의 구체적 실상까지 공개하고 나선 배경에는 무엇보다 극심한 외화난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해 9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서 시작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여파로 돈줄이 바짝 말라버린 상황에서 수십만~수백만 달러 수준의 보험금은 '빈집에 소가 들어오는'격일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인 해외은닉 통치자금(최대 60억 달러 추정)을 포착당한 북한이 최악의 궁지로 내몰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양무진 경남대 교수는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위험부담을 무릅쓰고라도 실리를 챙기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사건.사고에 대해 쉬쉬하는 데 급급했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라는 얘기다.

국제사회의 금융시스템에 눈뜬 북한이 이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국과 서방국가의 지원으로 자본주의 경제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북한 경제관료.전문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경제 전문가인 이영훈 한국은행 동북아경제연구실 과장은 "경쟁적으로 달러벌이에 나선 북한 기관들이 보험을 통한 손실보전에 눈길을 돌렸다는 건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진단했다. 대형 사고가 잇따라 터지는 상황에서 북한당국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란 풀이도 있다. 교통수단을 비롯해 낙후된 사회 기반시설과 안전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참사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보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에 지급될 보험금은 계약에 의해 이뤄지는 정당한 거래로 금융제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금융제재를 피해 합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달러벌이 채널을 총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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