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프랜차이즈 … 권리금 사기 … "창업도 힘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불황기 창업은 불안하다. 그럴수록 치밀한 상권 분석이 필요하다. 이경희 창업전략연구소장(오른쪽에서 둘째)이 예비 창업자들과 함께 서울 마포에서 길거리 상권을 분석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연초 잠시 햇살이 비치는가 하더니 다시 먹구름이 짙어져 버린 우리 경제. 활력을 잃어버린 경제 전선에서 일자리를 찾는 서민의 행렬은 힘겨웠다. 구조조정의 삭풍에서 밀려난 중년층과 취업난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이들은 창업.취업의 문을 기웃거렸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지난 10여 년간 수천 명의 예비 창업자에게 조언해온 창업컨설턴트인 이경희(42) 창업전략연구소장의 창업상담 일지 속에서 올 한 해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보통사람들의 노곤한 삶을 엿본다.

#3월 14일

이규형(48)씨. 서울 시내에 40평형대 아파트 보유. 동원 가능한 현금 1억5000만원. 담담한 표정이지만 자신감은 부족. 임원 승진에서 몇 년째 밀리자 지난해 9월 2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푹 쉬고 난 뒤 창업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어영부영 6개월이 지났다. 사업설명회나 창업박람회를 기웃거리는 일이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감도 없어 망설이고 또 망설인 것. 일단 다음달 초 열리는 창업 강좌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러겠다고 답은 했지만 말끝을 흐린다. 창업은 도전이다. 본인의 결심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조언을 잘해도 소용이 없다.

#4월 3일

4년제 지방대를 졸업한 강석현씨. 28세의 나이였지만 벌써 세 번이나 사표를 쓴 경험이 있다. 대기업 낙방을 10여 차례 거듭한 끝에 중소기업에 취직했지만 허드렛일에 임금까지 밀리자 올 1월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1000만원 정도로 창업할 수 있는 청소대행업 같은 영업형 사업에 관심을 보임. 하지만 청소대행업은 의외로 규모가 크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힘들다. 우선 외식업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해보라고 권유했다. 각종 자료를 챙겨 가는 자세가 씩씩해 보인다.

올해 초 침체에 허덕이던 내수시장이 살아날 조짐을 보이면서 내가 소장으로 있는 한국창업전략연구소의 마포 사무실은 활기를 띠었다. 사무실에서 열리는 창업 설명회 및 창업 교육 참가자 수도 지난해보다 20%가량 늘었다. 그러나 선뜻 창업에 나서는 이는 많지 않았다. 살아날 것 같았던 경기가 봄을 지나면서 다시 시들기 시작한 것. 오히려 문을 닫는 가게가 늘었다. 한국음식점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말 45만 곳이던 회원 업소가 올 8월 말 현재 43만 곳으로 줄었다. 새로 개업하는 곳을 감안하면 하루 200개꼴로 문을 닫는 셈이다.

#6월 8일

단 한 번의 상담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규형씨는 의외로 창업 강좌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5~6명의 예비 창업자가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관심사를 나누고 정보도 교환하는 '창업 살롱' 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 오늘 저녁 창업 살롱의 주제는 요즘 인기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는 떡삼겹살집. 이씨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창업 정보를 노트에 적고 있다.

#6월 12일

두 달 만에 사무실을 찾은 강석현씨. 오전에는 요리학원을 다니고, 저녁에는 선배가 운영하고 있는 서울 당산동의 삼겹살집에서 매니저 일을 하면서 일을 배우고 있다. 작은 주점을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고 한다. 당산동 인근에서 3000만원 정도로 시작할 수 있는 미니 포장마차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이번 주 중으로 사무실 직원을 보내 상권 조사를 도와주기로 했다.

창업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가 불안하다는 의미다. 2006년 8월의 공식 실업자는 80만7000명(실업률 3.4%). 그러나 실업률에는 잡히지 않는 '실망실업자'(장기간 취업이 안 돼 구직을 포기한 사람)나 무급 가족종사자(월급을 받지 않고 가족 일을 돕는 사람)를 합치면 실질적인 실업자는 공식 통계의 두세 배라는 분석도 있다. 너도나도 창업에 뛰어들다 보니 창업 시장은 포화 상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율은 약 30%. 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여기에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창업 시장은 때아닌 엄동설한이다.

#8월 24일

이규형씨가 '사고'를 칠 뻔했다. 친척이 추천한 '퓨전' 분식 프랜차이즈를 계약하러 갔다 막판에 포기한 것. 프랜차이즈 본사 직원이 안내한 점포를 임대 계약하려다 권리금(7000만원)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조사 결과 이 점포의 권리금은 3000만원까지 떨어졌다. 부동산 중개업체와 프랜차이즈 업체가 장난을 친 것이다. 불황은 창업 시장의 물까지 흐리고 있다. 어떻게든 한 건 챙겨 시장을 떠나려는 양심 불량자가 많아진 탓이다.

여름이 되자 성인게임장에 대해 문의해 오는 예비 창업자가 많아졌다. 거의 모든 가게가 '죽을 쑤고' 있는데 유독 게임장만은 성황을 이루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하지만 창업컨설턴트 업계에서는 '뭔가 사고가 나도 크게 날 것'이라는 말이 무성했다. 8월로 접어들자 '바다이야기' 파문이 터졌다. 막차를 탄 사람들이 결국 나락에 빠졌다는 소식을 접하는 우리 사무실의 분위기는 우울했다.

#9월 11일

미니 포장마차를 알아보던 강석현씨가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개업은 자신이 없어 좀 더 준비해야겠다'는 것. 그 대신 우리 사무소에서 개설한 '창업 및 프랜차이즈 전문가' 강좌를 듣고 싶다고 했다. 강좌를 이수하면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창업 매니저로 일할 수 있다. 현실을 감안한 그의 결심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9월 15일

드디어 이규형씨가 '사장님'이 됐다. 서울 송파에서 요즘 뜨고 있는 퓨전분식점 문을 연 것. 사기 소동을 겪고 나서 아이템에 대해 더 연구했다고 한다. 이씨는 상권 분석을 위해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 수를 일일이 체크하고, 주변 상가를 1주일가량 뒤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분석 결과 입지는 아쉽게 B급. 투자비 1억6000만원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만큼 발로 뛰어야 한다. 화사한 서양란을 마련해 축하 인사를 갔다. 고단했던 그의 꿈이 이 꽃처럼 피기를 기도하며.

◆ 특별취재팀:경제부문=정선구.이현상.심재우.김필규.임미진 기자, 사진 부문=신인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