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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아빠의 소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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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초보 '기러기 아빠' L씨. 석 달 전 중학생인 두 자녀를 아내와 함께 미국 중부의 한 중소도시로 보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영어도 어눌한데 인종차별이나 받으면서 스트레스만 받고 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기우(杞憂)였다. 아이들은 학교 생활을 무척 즐거워했다.

L씨는 며칠에 한 번씩 미국에 전화한다. 아이들이 전하는 미국의 학교 분위기는 매우 엄격했다. 입학 때 나눠준 30여 쪽짜리 핸드북에는 수백 개 조항의 교칙이 빽빽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어선 안 되며, 수업 중 화장실에 가는 것은 한 달에 네 번으로 제한한다 등…. 쉬는 시간에 교사들이 복도에 나와 아이들이 뛰어다니지 못하게 지켜 서 있고, 몇 분이라도 지각하면 곧바로 경고 카드를 준다. 수업 방식 역시 빡빡하다는 것이다. 쉬는 시간 4분, 점심 시간도 20분밖에 주지 않아 콩당콩당 뛰어다닌다(한국에선 쉬는 시간 10분, 점심 시간 45분). 정기시험 횟수가 한국의 두 배이고 일주일에 서너 번 돌발 퀴즈시험까지 본다.

규율이 엄격하고 수업이 벅찬데도 아이들은 왜 "즐겁다"고 한 걸까. 아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도 좋은 선생님이 많지만 대체로 미국 선생님이 더 열심히 가르치고,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선 일부 선생님이 기분에 따라 행동할 때가 있다. 이곳 선생님은 거의 모두 열 받을 만한 상황에서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처리한다.

.한국에선 선생님에게 먼저 인사해야 선생님이 알은체한다. 이곳 선생님은 먼저 아이들에게 인사한다.

.한국에선 수업 중에 떠들면 일부 선생님은 '너, 이리 나와'라고 한다. 이곳 선생님은 떠든 아이의 옆에 다가가 다른 학생이 듣기 어렵게 조용히 꾸짖는다.

.미국 선생님은 한국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숙제를 내준다.

L씨의 아이들이 공부하는 지역은 미국에서 외진 곳에 속한다. 최근 "공교육 시스템이 잘 돼 있다"는 소문이 국내에 퍼지면서 작은 시골 도시에 한국 학생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인이 주로 사는 거주 지역까지 생겨났다. 아침에 나가 보면 두세 집 건너 한 집꼴로 한국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풍경이 연출된다고 한다.

대개 한 국가가 어느 정도 발전하면 미국 유학생 수는 줄어든다. 대만.인도 등은 19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추이는 영 다르다. 천장 모르게 늘기만 한다. 얼마 전부터 인구 1억3000만 명인 일본보다, 심지어 13억 명인 중국보다 미국에 유학을 더 많거나 비슷하게 보내는 나라가 됐다. 선진국에 나가 공부하고 오는 것은 국가적.개인적으로 유익하다. 문제는 어린 학생들까지 미국행 출국심사대 앞에 줄을 지어 서게끔 하는 사회적 압력이 우리의 열악한 교육시스템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의 교육시설.인력은 어지간히 갖춰졌다. 그런데도 "공교육 시스템이 최악"이라고 아우성이다. 한 미국 유력지가 한국의 '기러기 아빠'를 다룬 기사에서 "아직 왕조시대의 교육체제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나라"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전근대적인 교육풍토가 이어지는 걸 모두 학교.교사의 책임으로 미뤄선 안 된다. 학부모.당국.언론 모두가 책임을 느끼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솔선수범해야 한다면 그것은 일선 교육을 책임진 학교요, 교사다.

L씨는 고민에 빠져 있다. 벌써 아이들이 미국에 남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언어 소통의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그곳 학교.교사의 교육방법이 낫다는 걸 금방 알게 된 것이다. 1년쯤 뒤, L씨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규연 탐사기획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