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금융제재 풀어주기 바랐지만 … 'N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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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조치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노 대통령이 13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 내 숙소인 영빈관(블레어하우스)에서 폴슨 장관을 만나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미국의 외교 소식통이 전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여기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는 것으로 그는 해석했다. 노 대통령의 질문엔 '대북 금융 제재 조치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고, 폴슨 장관의 답변에는 '그렇게는 잘 안 될 것'이라는 완곡한 거부의 뜻이 내포돼 있다는 얘기다.

◆ 언중유골(言中有骨)식 문답=이날 오후 4시30분 폴슨 장관의 예방을 받은 노 대통령은 먼저 미국의 금융제재 조치를 언급했다고 한다. "BDA 계좌 동결 등 미국의 대북 금융조치는 법에 따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6자회담의 재개 노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미국의 활동이 정당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6자회담 재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날 면담은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를 지휘하는 재무부 장관을 30분간 따로 만난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한.미 간 경제 현안이 접견 주제"라며 "두 사람이 대북 금융조치에 대해 대화를 나눌 가능성은 작다"며 면담에 쏠리는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노무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워싱턴 영빈관(블레어하우스)에서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워싱턴=안성식 기자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만일 대북 금융 제재 조치가 논의된다면 폴슨 장관 측이 먼저 그 배경을 설명하고 한국의 협조를 구하는 형식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 달리 노 대통령이 이 문제를 먼저 꺼냈다. 이는 노 대통령이 대북 금융 제재에 대한 우려와 함께 미국이 가급적 제재 조치를 빨리 종결해 6자회담이 재개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미국 측에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폴슨 장관은 그런 희망이 아직은 성급한 것임을 내비쳤다. 노 대통령은 접견에서 BDA 계좌 동결 외에 북한의 다른 불법 행위에 대한 미국의 제재 조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청와대 측 공식 설명=윤대희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은 이날 접견이 끝난 뒤 브리핑을 통해 "접견은 미국에서 손꼽는 아시아통인 폴슨 장관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며 "한.미 경협에 대한 평가와 무역자유화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주된 내용이었다"고 설명했다. 대북 금융 제재에 대해선 "노 대통령은 접견 끝 부분에 마카오 BDA 등에 대한 미국의 금융조치에 대한 폴슨 장관의 설명을 듣고 '미국의 법 집행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노력이 조화를 이루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고만 전했다.

윤 수석은 또 "노 대통령은 한국에 과소 배정돼 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쿼터를 늘리는 데 미국이 노력한 것에 사의를 표명하고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양국 모두에 이익을 줄 뿐 아니라 양국 관계를 격상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라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폴슨 장관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은 국제사회의 모델이며, FTA 협상은 성공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윤 수석은 덧붙였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존 스노의 뒤를 이어 올 5월 취임했다. 1990년대 74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중국통이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한 뒤 1974년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에 입사, 99년 최고경영자가 됐다. 탁월한 수완으로 회사의 이익과 주가를 크게 끌어올렸다. 지난해 연봉이 3830만 달러(약 360억원)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부시 대통령과 동갑(60세)으로 2004년 대선 때 부시 진영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 BDA 계좌동결 조치=2005년 9월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관련 계좌가 동결 당한 조치를 말한다. 미 금융 당국은 이 계좌가 북한의 범죄 행위와 관련됐다며 중국 측에 동결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북한 정권의 통치자금으로 추정되는 2400만 달러가 예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이 계좌를 풀어주면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를 일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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