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부시에 대북 유화책 주문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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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12일(한국시간) 핀란드 국회를 방문해 파보 리포넨 국회의장(오른쪽에서 셋째)의 안내를 받고 있다. 안성식 기자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12일 "유엔의 모든 회원국은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를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이틀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떠나며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9.19 공동성명 이행을 원치 않는 게 문제"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진정으로 다했다"고도 했다. 달러 위조 등 북한의 불법 행동에 대해서는 "미국은 소위 방어적 조치라고 일컫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며 "이는 법을 집행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소득없는 6자회담보다 실제적인 유엔 제재로 방향을 틀어야겠다는 얘기다.

◆ 임박한 대북 제재=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는 "(유엔 회원국이) 결의를 무시하거나 제스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유엔이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비난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열흘 만인 7월 15일 나온 유엔 대북 결의(1695호)는 미사일 개발 등에 사용될 수 있는 자금.기술.설비 제공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힐 차관보는 미 정부의 뜻을 다른 참가국에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해 왔다. 그의 발언에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예정된 수순대로 북한에 대한 압박과 봉쇄에 들어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미국의 본격적인 대북 제재가 임박했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힐 차관보는 북측이 핵개발 포기를 결단하지 않았음을 비난했다. 그는 11~12일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유명환 외교부 차관,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잇따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유엔 결의에 따른 미국의 대북 제재가 불가피한 쪽으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을 설명했다고 한다. 미 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에 필요한 기술.자본의 이동을 막는 방안과 함께 빌 클린턴 정부 시절 풀어줬던 미 기업의 대북 금융.무역 거래 규제를 복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불발에 그친 북.미 베이징 회동=시선은 14일 열릴 한.미 정상회담으로 옮겨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의 입장에 배치되는 의견을 제시해 불편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대북 제재에 반대 의사를 밝히고 '북.미 간 양자 접촉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유화책을 주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외교가의 관측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 대통령은 11일 핀란드에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같은 날 힐 차관보를 만나 그가 양자회담에 부정적임을 알면서도 북.미 회담을 권유했다.

이에 따라 대북 압박 수위를 높이려는 부시 대통령과 대북 설득을 우선시하는 노 대통령 간의 대화가 주목된다.

힐 차관보는 5~10일 중국에 머무는 사이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6자회담 복귀 의사 표시를 전제로 한 양자대화를 제의했으나 북측은 이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미국에)안보리 결의에 따른 조치를 유예하자는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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