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극적 타결된 노사관계 로드맵 국제 기준에 근접한 '모양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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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03년부터 3년간 끌어오던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로드맵)이 노사정 간에 극적으로 일괄 타결됐다. 이번 합의로 한국의 노사관계 법.제도도 국제기준에 근접한 모양새를 갖추는 발판을 마련했다. 직권중재 폐지나 경영상 해고를 쉽게 한 것 등은 큰 진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 민감한 문제는 3년 뒤 다시 파국의 불씨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번 합의가 '폭탄 돌리기'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 합의 내용은 국제수준=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2010년 1월 이후로 시행이 미뤄진 것을 제외하면 노사정 간 합의 내용은 국제기준에 부합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국제노동기구(ILO) 등이 '악법'으로 규정한 직권중재가 1953년 만들어진 이래 54년 만에 폐지(2008년 시행)된다. 필수업무 유지 의무나 대체근로 허용이란 안전장치도 국제기준에 맞게 고쳐진다.

고용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안도 보강됐다. 경영상 해고 통보기간을 조정함으로써 경영상 해고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대신 기업의 사정이 좋아져 3년 이내에 같은 업무에 사람을 채용해야 할 경우 경영상 해고된 인력을 의무적으로 채용토록 해 고용의 안정성도 꾀할 수 있게 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3년짜리 시한폭탄=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3년간 유예됨으로써 노사 모두 한시름 돌릴 수 있게 됐다. 노조는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사측은 복수노조에 대비한 노무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기업에 노조가 여럿 생기면 교섭 창구를 어떻게 단일화할지, 전임자 수를 얼마나 줄일지 노사가 합의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노사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이번 합의의 의미는 반감할 수밖에 없다.

◆ 비난 면키 어려운 정부=지난달 26일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가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본격 논의된 때부터 정부는 딱 부러진 입장이 없었다.

노동부는 당초 유예안을 절대 받을 수 없다(8월 초)고 했다가 2일에는 5년 유예안을 수용할 듯한 자세를 보였다.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조건부 1년 유예안'을 내놨다. 이마저도 노사에 거부 당하고 노사가 '조건 없는 3년 유예안'을 내놓자 정부는 '조건부 3년 유예안'을 내놨다. 그러다 결국 11일 노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시시각각 입장을 바꾼 것이다. 노사정위 관계자는 "노동부의 원칙 없는 일처리가 혼란과 갈등만 부추겼다"며 정부의 정책 부재를 지적했다. 앞으로 남은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이런 모호한 정부의 입장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 등 돌린 양 노총=조성준 노사정위원장은 "외환위기 직후 노사가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등의 합의를 한 적은 있으나 법과 제도를 노사정 간 합의로 바꾸는 것은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일"이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이번 합의가 나오자 총파업을 선언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 여진은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11일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마치고 노사정위원회를 나서던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등을 폭행하기도 했다. 한국노총은 이를 두고 "백주대로의 집단 테러"라며 비난했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9일 조준호 위원장과 장시간 얘기했지만 민주노총과는 합의가 이뤄질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입법을 강행할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김기찬 기자

◆ 직권중재=필수공익사업장에서 파업 조짐 때 노동위원회가 직권으로 파업을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직권중재가 내려지면 15일 동안 파업을 할 수 없다. 직권중재가 내려진 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 불법이 된다. 15일 뒤에도 노사 간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노동위원회가 강제로 중재안을 낸다. 이 중재안은 단체협약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 필수공익사업장=업무가 정지되면 국민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 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공익사업장을 말한다. 현재는 철도(도시철도 포함), 수도, 전기, 가스, 석유정제 및 석유공급사업, 병원, 한국은행, 통신사업장이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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