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칼럼

나라의 품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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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해인 수녀는 최근 한 강연에서 "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1등을 했는데 친구가 '글 잘 쓰는 애가 얼마나 없으면 네가 1등을 했겠니'라고 하더라"며 말에 의한 상처를 얘기했다. 자식을 낳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 앞에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푸념을 늘어놓거나 문병 가서 "팔자 늘어졌네"라고 농을 건네는 것도 삼가야 할 말이다. 그러고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YS)도 그리 훌륭한 문병객은 되지 못했나 보다. 5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테러를 당했을 때 기껏 문병 갔다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테러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많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그리스 방문 중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찍은 사진이 화제다. 선글라스를 낀 채 신전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찍은 전형적 '한국판 관광 증명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 열 받은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 대통령은 9.11 테러사건 직후 휴가지에서 말 타는 사진이 나와도 괜찮던데 왜 시비냐고? 부시 대통령은 '이 정도 사건에 미국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과시하려 했다면 노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환수,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설 파문에도 한국은 끄떡없다'는 걸 보여 주려 한 것이라고? 이 사진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본래 '반노무현'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현 정권의 지지율이 바닥권을 헤매는 것이다.

상습적 학내 폭력에 시달리는 자식에게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아" "그걸 문제 삼는 네 친구들이 더 문제야"라고 한다면 그게 부모인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이 다수인데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 "그건 무력 공격을 위한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하고 "언론이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건 대통령의 도리가 아니다. 돈 좀 뜯기고 몇 대 얻어맞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부모라면, 또 대통령이라면,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고 안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게 순리다.

한 국가의 품격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만들어 가는 향기다. 품격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다. 특히 지도자의 언행은 한 나라의 품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시의 미국과 고이즈미의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해 가는 것도 바로 그 지도자들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경제 IMF가 아니라 '품격 IMF'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도 정권에 의해 유발된 측면이 강하다.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된 측근을 모조리 사면.복권시키면서 "그들은 낡은 관행의 피해자"라고 억지를 부린다. 현 정권의 핵심 인사 개혁안으로 내세웠던 공개모집제를 '낙하산 인사'의 포장용으로 전락시키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책임정치'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마지막엔 측근들을 사면하지 않았느냐고? 미국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 6000개의 자리에 자기 사람을 임명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미국을 욕하면서도 미국의 나쁜 모습은 내게 유리하면 이용하겠다는 것인가.

정권이 염치없으면 국민에게 염치를 요구할 수 없다. 정권이 억지를 쓰면서 이익단체에 "국익을 위해 좀 양보하라"고 해 봐야 먹힐 리 없다. 국민은 하루 살기 힘들어 허덕이는데 "경제가 좋아도 민생은 어려울 수 있다"고 하니 국민은 더 약오르는 것이다. 그런 말과 행동이 쌓이고 쌓여 "요즘 외부에서는 대통령을 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욕먹는 분위기(염동연 열린우리당 의원)"가 됐다. 대통령의 관광 사진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