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천하(天下)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영웅'이 나온 2002년. 중국 당국이 이례적으로 흥행 지원에 나섰다. 불법 DVD 제작을 막고, 시사회에는 당 지도부가 대거 참석해 바람을 잡았다. 무슨 까닭인가. 영웅은 진시황과 자객을 그렸다. 자객은 진시황 살해가 가능한 10보 앞까지 접근했지만 거사를 포기한다. '천하(天下)'의 안정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진시황에 감복한 것이다. 영화 속의 천하 대의(大義) 운운은 한(漢)족을 열광시켰다.

서주(西周)는 천(天)을 최고신으로 섬겼다. 천의 뜻이 천명(天命)이고, 천명을 지상에 실현하는 이가 천자(天子)다. 천자가 통치하는 곳을 천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주 사람은 천자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도 천하에 포함시켰다. 모든 땅과 사람을 천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패권적 사고다. 천하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뜻하게 됐다.

천하가 해체된 것은 청나라 말기다. 청은 아편전쟁으로 동아시아 중심으로서의 힘을 잃었다. 청과 책봉-조공 관계에 있던 나라 중 먼저 유구(琉球)가 1879년 이탈해 일본의 오키나와(沖繩)가 됐다. 베트남과 라오스.미얀마도 떨어져 나갔다. 이어 조선이 1897년 국호를 대한으로 고치고 왕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천하 해체가 완료됐다.

1949년 대륙을 석권한 중국공산당은 정체성 문제에 부닥쳤다. 56개 민족을 어떻게 아우를 것인가. 고심 끝에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냈다. 중화민족은 56개 민족의 단순 총합이 아니라, 한족과 이민족이 상호 작용하며 융합한 '복합 민족'이라고 강변한다. 만주족 등 각 민족을 중화민족의 하위 개념으로 넣으며 '중국=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역사적으로 활동했던 모든 민족은 중화민족이며, 이들의 역사적 활동이나 왕조 역시 모두 중국사의 범주에 속한다"는 주장을 편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둔갑시키는 논리다. 동북공정 등 이런저런 공정은 모두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하늘 아래 모든 백성과 땅은 천자의 것이라는 천하 사상의 회복을 연상시킨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 천하 사상의 현대적 변형이라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중국이 이런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힘이 강해진 근년 들어서다. 중국과의 '역사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 역사는 강자가 쓰지 않던가.

유상철 국제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