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7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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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백남운 「독립동맹」위원장에/서울 조선공산당은 철저히 따돌림 당해
46년 1월께 서울에 와서 암약하고 있던 연안 독립동맹 부주석 한빈는 일제때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였던 백남운을 포섭,평양으로 보내 김두봉과 김일성을 만나게 한뒤 46년 2월5일 서울에 독립동맹 서울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로써 소련을 배경으로하는 김일성 세력과 중국 세력이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서울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에서는 김일성세력과 중국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많은 비밀당원들을 프락치로 파견했다. 연안독립동맹 서울특별위원회의 중앙위원과 당원의 90%는 조선공산당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김두봉의 밀명을 받고온 백남운은 그의 위원장 취임사에서 『영웅적 항전을 지속해온 세력으로서 해내에 김일성장군이 있고 해외에 연안독립동맹이 있거니와 이와같이 실력을 구비한 독립동맹이 환국이래 오랫동안 지켜오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38선 이남에서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기로 되었다』고 말했다.
「해내에 김일성장군이 있고 해외에 연안독립동맹이 있거니와…」하고 비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김일성이 국내에서 활동한 것같이 말하고 있는데 김일성이 언제 국내에 있었는지 백남운은 김일성의 앵무새가 되어 첫날부터 국민대중을 속이려 했다. 조선독립운동을 김일성과 연안독립동맹이 다한 것처럼 말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은 정치자금을 김일성에게 얻어왔기 때문이었다.
38이북에서 은행과 일본인과 조선사람 자산가에게서 몰수한 돈은 막대한 것이었다. 처음 김일성과 김두봉이 서울에 파견한 조직원은 한빈ㆍ구재수ㆍ고찬보ㆍ박동철등이었으나 한빈은 노골적으로 조선공산당안에 손을 뻗쳐 분파행동을 했기때문에 박헌영에게 쫓겨 서울에 있지 못하고 평양으로 소환되어 갔다.
서울에 연안독립동맹 특별위원회를 조직한 3일후인 2월8일 평양에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장은 소련에서 온 김일성이고 부위원장은 중국 연안에서 온 김두봉이었다. 최고 간부에 국내에서 국민대중과 같이 투쟁한 사람은 없고 소련과 중국의 연합괴뢰정권이었다. 그리고 그날 동시에 인민군의 간부 양성 사관학교인 평양학원을 창설했다.
교장은 만주에서 활약하던 소련ㆍ중국 양측의 공작원이었던 김책이고 교무주임은 소련 타슈켄트 조선인 중학의 교무주임인 기우복이었다. 다같은 공산주의자지만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는 아무 연락도 없고 관계도 없는 정권이 38이북에 수립되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떻게 할 힘과 방책이 없었다.
서울의 우익보수진영은 조선공산당 중앙본부를 소련 앞잡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사실 스탈린은 소련군의 첩보공작원 김성주라는 자를 김일성으로 날조하여 평양에 파견,자기들의 괴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기초공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발행하는 신문ㆍ잡지등 소련의 출판물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의 동구정책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동구에서 진행하고 있는 정책 패턴은 북한에서 진행하고 있는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김일성은 아직 북조선을 혁명기지 혹은 민주기지로 하여 조선혁명을 완수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어도 그 본심은 알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이 영토를 확장하며 배상금을 물리는 제국주의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고 독일ㆍ이탈리아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반파쇼공동투쟁이기 때문에 영토의 탈취와 배상금은 물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폴란드의 동부지역을 탈취하고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야 지방을 병합했을 뿐아니라 동유럽에 완전히 소련의 괴뢰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영토확장과 마찬가지며 또한 동구의,특히 동독의 공장 기계시설들을 소련으로 떼어갔기 때문에 실제로는 배상을 물린것과 같은 결과였다.
만주와 북조선에서도 일본이 건설한 거대한 공장시설을 많이 뜯어가고 있었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도 하지않는 짓을 서슴지않고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되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노획한 일본군 무기를 중공군에 양도해 주었다.
스탈린은 만주와 북한에 괴뢰정권을 세워 실질적으로 소련의 영토로 만들려는 속셈이 우리 눈에 보이게 되었다. 그후 일이지만 중국 공산당 만주책임자 고강이 만주의 공장시설을 소련이 염치도 없이 뜯어가는것을 반대하자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압력을 가해 고강을 죽이게 했다.
고강은 모택동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장개석에게 쫓겨 2만5천리를 달아나도 갈데가 없는것을 보안ㆍ연안지방에 공산기지를 만들고 있던 고강이 모택동 일파를 구해준 것이었다. 모택동도 스탈린의 강압에는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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