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변호사의 내 고장 희망찾기 ⑩ 서울 사당동 '양지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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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에서부터 디자인시공까지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조성한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양지공원. [희망제작소 제공]

서울 지하철4호선 총신대역에서 숭실대 쪽으로 10분쯤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틀면 경사가 제법 급한 골목이 나온다. 다시 5분쯤 걷노라면 왼편에 '양지공원' 표석이 보인다. 560평의 이 공원은 도심에 작은 숲길을 만들고 있다.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이 공원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조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공원을 처음 설계하는 과정에 참여한 서울대 김성균(조경학) 교수를 만나 시민참여형 공원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1995년 서울시가 소공원 만들기 사업을 시작했다. 연간 100여 곳의 공원이 생겨났다. 주민의 요구는 다양한데 시에서는 용역회사에 맡겨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심사위원이던 김 교수가 "주민들의 참여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동작구청이 역세권 지하주차장을 만들려고 계획을 세우자 주민들이 위원회까지 구성해 반대하는 곳에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98년 1월 15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동사무소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열고 사업을 추진했다. 처음 주민들은 '정말 되는가' '이야기만 꺼내 놓고 헛수고하는 것 아니냐'고 반신반의했다.

주민이 원하는 시설을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많은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300여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도 했다. 그 결과 놀이터, 야외 장기판, 휴식시설, 정자, 배드민턴장 등을 만들기로 했다. 그 다음 시설을 어디에 설치하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의견을 나눴다.

문제는 어린이 놀이터였다. 소음이 난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자기 집 앞에 두는 것을 반대했다. 갑론을박이 오간 끝에 전문가 의견을 따르자는 데 모두 동의했다. 주민의 합의 없이 놀이터 설치를 강행했다면 민원이 끊이지 않고 공사는 지연되었을 것이다.

정자도 산이 잘 보이는 곳에 짓도록 했다. 이렇게 주민들이 원하는 시설과 그 배치 장소를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시공자가 잘할 수 있도록 도면을 그려 주었다.

기본계획을 세우고 난 뒤 시공 과정에서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았다. 주민들은 나무가 싱싱하지 않아 보이면 좋은 나무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조경수와 외곽 울타리의 소재도 주민이 선택했다. 예산 범위 안에서 제일 좋은 재료로 시공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뭔가 흔적을 남겨 두어야 세월이 지나더라도 애정이 갈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손도장을 찍어 공원 계단 벽에 설치하기로 했다. 한번 찍는 데 3만원을 받았는데도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남는 돈으로 청소도구 등을 구입했다. 할아버지 한 분은 빗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청소도 하고 불량 청소년을 쫓아냈다. 이 공원이 주민의 공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깨진 공원 가로등을 스스로 교체하는 등 주인의식이 생겨났다.

이렇게 잘 굴러가는 상황에서 외환위기 이후 구청이 실업자 구제 차원에서 공공근로 인력을 공원에 배치한 것이 역효과를 가져왔다. 1~2년 지나면서 주민들이 할 일이 없어졌고 공원을 돌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2006년 5월 구청은 많은 돈을 들여 공원을 단장했다. 낡은 놀이터를 새롭게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계단 턱을 너무 높여 아이들이나 어르신들이 다니기에 불편해졌다. 장애인은 아예 출입이 불가능해졌다. 시민들의 참여로 만든 좋은 공원을 공무원이 손대면서 오히려 나빠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시민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www.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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