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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바다서 만난 생명의 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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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 피터 누엔(62.(左))이 인천공항으로 마중 나온 전제용(66)씨를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인천공항=박종근기자

"하이, 캡틴 전."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을 빠져나온 줄무늬 와이셔츠 차림의 60대 동양인 한 명이 똑같은 옷을 입은 한 남자를 발견하더니 손을 번쩍 들고 달려가 긴 포옹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민스터시에서 날아온 베트남 보트피플 출신 피터 누엔(62)과 그를 구조한 전제용(66.양식업.경남 통영시 미수동)씨. 이날 누엔이 입고 온 와이셔츠는 전씨가 2004년 누엔의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선물했던 것.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은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와 서로의 우정을 과시했다. 누엔은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에 같은 옷을 입는다"며 활짝 웃었다.

원양어선인 '광명 87호'선장이던 전씨는 1985년 11월 14일 참치잡이를 마치고 부산항으로 귀항하기 위해 남중국해를 지나다 침몰 직전의 난민선을 발견하고 누엔 등 96명을 구조했다. 영어에 능통한 월남군 장교였던 누엔은 이 난민선의 '대표'였다. 당시 난민선이 워낙 많아 대부분의 배가 못 본 척 지나칠 때였지만 전씨는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을 부산항까지 데려왔다.

누엔은 부산에 있던 적십자사 난민수용소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1년6개월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누엔은 LA 한 병원의 남자간호사로 취업했다. 전씨가 구조했던 대부분의 난민도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LA에서 '리틀 사이공'이라는 베트남 마을을 꾸렸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의 은인 '캡틴 전'을 잊을 수 없었다. 누엔은 미국에 정착하면서 전씨를 찾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누엔은 한국인을 볼 때마다 전씨를 수소문하다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의 한국인 간호사 김순자(65.여)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씨는 수협 직원인 국내 친척에게 부탁해 2002년 5월 전씨를 찾게 된다. 전씨가 원양어선 생활을 마치고 통영에서 우렁쉥이 양식업을 할 때였다.

두 사람은 2004년 8월 5일 누엔이 전씨 가족을 미국으로 초청하면서 19년 만에 감격의 해후를 했다. 전씨는 베트남인들과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로부터 '베트남 보트피플의 영웅'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전씨는 난민 구호 및 원조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유엔 난셍상'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누엔은 병원에서 은퇴한 뒤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전씨는 절망의 바다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이라며 "죽는 날까지 은인들에게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누엔은 3주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전씨의 양식장 일을 돕고 난민수용소가 있던 부산 수영천 일대도 둘러볼 예정이다.

김상진 기자<daeda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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