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꼬리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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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백화점의 우수고객에게는 주차장이 따로 있다. 전용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며 쉴 수도 있고, 추가 할인도 받을 수 있다. 매출의 대부분(80%)이 소수(20%)의 단골고객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비용 대비 효율을 감안하면 일반 고객은 버려도 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선택과 집중, 바로 '파레토의 법칙'이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주장한 20 대 80의 법칙은 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루종일 걸려오는 전화 중 80%는 친한 20%의 것이고, 인구의 20%가 국가 전체 돈의 80%를 가지고 있고, 20%의 근로자가 80%의 일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쓰는 말도 그렇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지프는 성경과 소설 '백경'에 나온 단어를 빈도수대로 늘어놓으니 파레토 곡선과 비슷한 그믐달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프의 법칙'은 한국어라고 예외가 아니다. 우리말에서 자주 쓰는 단어 1000개만 알면 우리말의 75%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단어는 30만 개가 넘는데…. ('과학 콘서트')

파레토의 법칙을 통쾌하게 뒤집은 게 인터넷이다. 스가야 요시히로(管谷義博)는 "시장의 중심이 소수(20%)에서 다수(80%)로 옮겨가고 있다"며 이를 '롱테일(long tail) 법칙'이라고 불렀다. 미국의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매출의 절반을 비인기 서적에서 올린 사례를 들었다. 파레토 곡선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긴 꼬리 부분이 통통하게 커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소통 비용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롱테일 법칙')

스가야의 책이 나오기도 전에 롱테일 법칙을 정치에서 성공시킨 이가 노무현 대통령이다. 현역의원 한 명으로 후보 경선을 시작한 그는 '노사모'라는 인터넷 기반의 꼬리를 모아 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다른 정치인은 상상도 못한 역발상이다. 노 대통령은 꼬리의 반란을 국정운영에도 도입했다. 국민을 20집단과 80집단으로 나눈 뒤, 20집단을 공격하고, 80집단의 분노를 자극해 결집하려 했다. 결과는… 실패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단어의 균형발전을 위해 자주 쓰는 단어 1000개를 쓰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지시를 전달하는 것조차 어렵지 않을까. 아니면 또 다른 단어들이 대신 최고 빈도수를 자랑하게 될까. 파레토 법칙이 배제의 법칙이라면 롱테일 법칙은 포용과 상생의 법칙이다. 꼬리도 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장사가 아닌 국정에서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