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 내가 겪은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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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때 화물열차를 타고 피란을 떠나는 사람들.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피란민이 희생됐다. [미군 사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1950년 6월 25일은 유난히 화창한 초여름 날이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난 친구들과 골목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군용차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다급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장병들은 부대로 복귀하라.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궁금한 마음에 집으로 달려가 보니 전쟁이 났다고 했다. 어른들이 전차(戰車.탱크) 운운했지만 열 살이었던 내가 아는 전차는 시내를 땡땡거리며 달리는 전차(電車)뿐이었다.

집에는 장독대로 쓰던 좁은 반지하 공간이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그곳으로 모았다. 식량 사정이 나빠지자 어머니는 시루에 콩나물을 키웠다. 콩나물 비린내가 코를 찔렀고, '쪼르르' 물 붓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이웃 사람 몇몇은 전쟁 초기부터 붉은 완장을 찼다. 공산당원이 돼야 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았다. 의용군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큰아들을 멀리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시키고 당신은 복구 사업에 나가지 않겠다며 다리를 저는 시늉을 했다. 우리 집 대문에는 '반동의 집'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반지하실 생활은 답답했지만 우리는 '쌕쌕이'가 서울 상공을 날아다니면 장독대에 뛰어올라가 태극기를 흔들곤 했다. 인민군이 그 모습을 봤다면 우리 가족은 성치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시내에 나가보니 내 또래들이 모두 뭔가를 팔거나 구두닦이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나도 장사에 나섰다. 현재의 중국대사관 부근에 있던 차이나타운에서 산 꽈배기를 담은 좌판을 목에 걸고 다니며 팔았다.

그 시절에 과자를 사 먹을 여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앳된 인민군들이 사 먹곤 했다. 그들은 어린 나를 세워 놓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 "남조선 동포들을 해방시키러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특이한 억양이 신기할 뿐이었다.

1.4 후퇴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트럭을 구해 왔다. 다시는 인민군 치하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몇 가족이 그 위에 올라탔다. 찬바람 부는 겨울에 우리 남매들은 밧줄을 부여잡고 길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린 한강변은 지옥이었다. 사람과 차가 한데 엉겨 목숨을 건 탈출을 하고 있었다. 차가 덜컹거리면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추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는 멈춰 설 수 없었다. 떨어진 사람은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차에 남은 가족은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눈뜨고 가족과 생이별하는 순간이었다. 부산까지는 1주일이 넘게 걸렸다. 먹을 것이라곤 꽁꽁 언 주먹밥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제과점을 시작했다. 전에 큰딸이 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실패했다. 전쟁 통에 누가 비싼 과자를 사 먹을 수 있었겠는가.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가족이 거리에 나가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53년 초 서울로 돌아왔을 때 집은 불타버렸다. 우리는 빈 집에 들어가 살았다. 집을 고치고 나서 아버지는 다시 하동관을 열어 영업한 뒤 63년에 폐업했다. 자식들 교육을 마쳤기 때문이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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