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문화cafe] 9·11 다큐 보는 듯 … 아니 체험하는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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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폴 그린그래스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
홈페이지: (www.flight93.net)

20자평: 판단은 보류, 비극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카메라의 힘.

이 영화의 소재는 불과 5년 전의 실화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범들은 네 대의 비행기를 납치했고, 그중 두 대가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했다. 다른 한 대는 국방부 건물에 추락했지만, 마지막 한 대는 목표지점이 아닌 펜실베이니아 외곽의 허허벌판에 떨어졌다. 나중에 공개된 위성전화 통화내용에 따르면, 탑승객들이 모종의 저항을 한 결과 테러범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플라이트 93'(원제 United 93)은 바로 이 비행기, UA93편에 초점 맞춰 9.11사건을 재구성한다.

여느 상업영화라면 결말을 아는 것만큼 싱거운 일도 없지만, 이 영화는 쉽게 상상 못할 방식으로 이 결말에 접근한다. 할리우드 극영화로는 가장 먼저 관객, 특히 미국 관객에게 아직도 상처가 생생한 사건을 다루면서 감독은 그 목표를 다른 데 두고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이 비극을 흡사 다큐멘터리를 보듯 팩트 위주로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것, 그래서 그 경악과 공포의 순간을 마치 관객이 함께 체험하는 듯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히 이 영화는 초대형 빌딩의 붕괴나 항공기 납치를 '타이타닉'처럼 그려내는 재난 블록버스터도, 탑승객 중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한 가슴뭉클한 휴먼드라마도, 그들의 저항에 초점 맞춘 영웅담도 아니다. 정치적 판단 역시 놀라울 정도로 배제한다. 알카에다,빈 라덴,부시 대통령,미국의 대외정책 같은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들은 악랄한 납치범이 아니라 막중한 임무 앞에서 처절한 긴장을 겪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특정한 주인공도 없다. 출연진은 모두 얼굴 모를 배우들과 사건 당시의 실제인물들이다. 카메라는 항공기 승무원과 탑승객, 지상의 항공국과 관제탑, 때마침 작전훈련이 예정돼 있던 공군사령실을 숨가쁘게 교차편집하면서 그날의 사건을 조각보 맞추듯 재구성한다. 언뜻 무미건조한 기법이지만, 그럼에도 핸드헬드로 촬영한 화면이 고조시키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다. 항공국이 의심하던 몇몇 항공기의 피랍 가능성이 이내 생중계된 무역센터 충돌 장면으로 확인되는데도 전투기는 좀체 출격하지 못한다. 불가항력의 상황을 파악한 승객들은 두려움에 떨며 가족들에게 전화로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한편, '뭔가 해보자'며 테러범에 저항하려 한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 '화씨911'의 선동적인 부시 비판이나 요즘 온라인에 광범하게 유포된 다큐 '루스 체인지'의 음모론을 접해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중립적 시각이 성에 안 찰 수 있다. 팩트에 근거했다고 해도 비행기 안의 상황은 결국 감독의 상상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데, 왜 자기만의 정답을 내놓지 않는 것일까. 이 영화의 답변은 아마 이렇게 요약될 듯싶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덕을 봤는지 따지기 이전에 이 사건 자체가 얼마나 참혹한 비극이었는지 오싹하게 느껴보라고.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이 점만으로도 무시무시하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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