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어느 동독가족 이야기 '굿바이 레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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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에서는 '오스탈지아(Ostalgia)'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오스탈지아는 동독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鄕愁)의 '노스탈지아(Nostalgia)'를 합친 말로, 동독인들의 구 사회주의 체제를 향한 그리움을 가리킨다. 통일된 지 14년이 흘렀지만 서독과 동독이 여전히 실업률과 가구당 평균소득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동독인들은 동독 시절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 트라반부터 의류.식료품.장신구 등 과거의 물품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트라반은 구입 신청 후 출고까지 10년이 넘게 걸리는 사치품이었지만 통일 후에는 세계적인 자동차 기술을 보유한 옛 서독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던 자동차다.

이러한 복고풍에 대해 이제서야 동독인들이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구 체제에 대한 미화요, 일종의 현실 도피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24일 개봉하는 '굿바이 레닌'은 이 오스탈지아를 부추기는 데 단단히 한몫한 영화다.

이 영화는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 식물인간이 됐다 열달 만에 깨어난 어머니(카트린 사스)에게 통일이 된 사실을 숨기는 아들(다니엘 브륄)의 이야기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동독 시절의 모든 것, 음식부터 TV 뉴스까지를 '조작'하는데 그 과정이 거의 '예술'수준이다.

영화에서 코믹 터치로 그려지는 '그 시절'과 이를 받쳐주는 모자 간의 따스한 정과 휴머니즘이 특히 구 동독인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키면서 올 초 개봉 당시 6백25만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 독일 영화 흥행 사상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 영화는 나치 포로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건 놀이란다"라고 속이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독일판이라 할 수 있다.'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의 거짓말로 아들의 인생이 잠시나마 아름다울 수 있었다면, '굿바이 레닌'에서도 아들의 거짓말로 어머니는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간다.

물론 거짓말은 쉽지 않다. 이게 어디 보통 거짓말인가. 가령 통일 전 어머니가 즐겨먹던 오이 피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들은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빈집에 들어가 예전의 식료품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침실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에 코카콜라 현수막이 붙자 어머니는 아연실색한다. 아들의 천연덕스러운 대답. "코카콜라의 창업자가 사실 사회주의자였대요." 위성방송 서비스 요원으로 근무하는 아들은 '완전범죄'를 위해 동독의 발전상을 담은 뉴스까지 만들어 틀어준다.

영화의 압권은 방에서만 지내던 어머니가 불쑥 거리로 나가는 대목이다. 하필이면 철거되는 레닌 동상과 마주칠 건 또 뭔가. 하지만 영화는 판을 깨는 대신 여운을 선사한다. 별일 아닌 것처럼 처리되지만 어머니는 그 대목에서 진실을 알아차렸던 게 아닐까. 아들의 효도에 똑같은 아름다운 거짓말로 보답을 한 건 아닐까.

영화는 막바지, 어머니가 기실 남편의 서독 망명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열성당원의 일생을 살았던 사연을 공개한다. 이 지점에서 어머니도 아들을 속였을지 모른다는 심증은 한층 굳어진다. 두 사람이 서로를 속여가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건 무엇일까.

그것을 구 체제에 대한 집착이나 향수로 읽는다면 다소 억지일 듯싶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철 지난 사회주의에 보내는 우월감 섞인 연민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무리인 듯하다.

볼프강 베커 감독은 여기서 체제나 정치보다 가족 간의 사랑에 무게를 둠으로써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피해간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들 가족에게 통일은 최선이었을까.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최선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일까. 대의나 구호는 개인의 행복과 왜 어긋나기 쉬운 것일까. 12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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