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리는 명문' 향토를 빛내는 우량 스포츠팀 <17> 근화여고 탁구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물론 탁구선수이기 때문에 운동을 열심히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평생을 선수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선수이기 이전에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잔소리를 많이 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쉰이라는 나이로는 믿기 어려운 여고생같은 단정함이 몸에 밴 경주 근화여고 (근화여고) 탁구부 김영자 (김영자) 감독 수녀의 말이다.
서무과장을 겸하고 있는 김감독수녀는 그 자신이 50년대 후반 부산 경남여고배구팀 창단멤버로서 우승도 여러 번 해본 적이 있는 배구선수 출신으로 현재 중견배구인인 김영대(김영대) 국제심판의 큰 누님.
자신의 생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리를 어린 학생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운동과 여성으로서의 준비를 범행하라는 「골치 아픈」 잔소리를 계속한다고 했다.
근화여고 탁구부가 창단된 것은 여중보다 한해 늦은 지난 64년으로 올해로 4반세기가 넘는 26년째.
근화여고는 가톨릭재단이 설립한 학교로서 실질운영자인 수녀들이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었던 스포츠인 탁구를 교기 (교기) 로 채택한 것.
단지 전인 (전인)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창단된 탁구팀은 초기 10년간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당시 우남규 (우남규) 감독은 경주출신의 열성 팬인 김태준 (김태준·전경북탁구협회장) 판사의 후원을 등에 업고 김순분 (김순분) 방선옥(방선옥) 황월순 (황월순) 박말분 (박말분· 이상 전국가대표) 등을 키워내며 창단 15년만인 79년 제33회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마침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대회 단체우승 13회·준우승 17회 (중학은 우승16·준우승7회) 를 비롯, 개인전 우승만도 30여회를 넘어 명실상부한 탁구의 명문이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88년 학생종합대회 우승으로 대회 3연패를 달성한 것을 비롯해 87년 5관왕, 88년 4관왕, 그리고 89년엔 종별선수권과 전국체전을 휩쓰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화려한 전적이 말하듯 현재 9명인 대표상비군중 이태조 (이태조) 권미숙 (권미숙· 이상제일모직) 이정애(이정애· 대한항공) 정영아(정영아·한일은)등 4명이 모두 근화출신.
그 동안 걸출한 스타가 없으면서도 양영자 (양영자) 김숙 (김숙) 이계선(이계선)등을 배출한 이일여고와 쌍벽을 이룰 수 있었던 근화여고의 저력은 다양한 전형의 선수를 고르게 육성하는데 있다는 것이 과거 근화여고감독을 지낸 최국원씨 (최국원· 탁구협회사무차장) 의 분석.
실제로 근화여고는 지금도 노연호(노연호·왼손드라이브) 박순재 (박순재· 셰이크 공격형) 신관호 (신관호·펜홀더 드라이브)등 전형이 다른 3명의 코치가 31명(고14·중17)의 선수들과 숙식을 같이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2명의 코치를 보유한 다른 학교의 선수들보다 다양한 전형을 배우고 또 대비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있는 것이다.
근화선수들은 연습량이 부족하거나 정신상태가 해이해지면 가차없이 야간훈련을 시작한다.
유일한 휴식시간이자 자유시간을 야간훈련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선수들은 수업에, 그리고 정규훈련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수녀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철저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항시 갖고 있다는 김감독수녀는 그러나 졸업생들이 찾아와 그 잔소리가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인사할 때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했다.
그것이 곧 전통의 맥을 잇는 뿌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김인곤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